1與3野 체제, 상법 개정안의 운명은
여야 간 협상 테이블은 크게 2+2로 나뉜다. 여야가 대척점에 있는 두 가지 사안과 의견 접근이 비교적 쉬운 두 가지 사안이 있다. 하지만 실제 국회 통과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가 열렸지만 상법 개정안은 전 단계인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류된 상태다. 27일 다시 논의한다는 방침이지만 김진태(자유한국당) 의원 등의 반대가 만만찮다.
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선출
여야 견해차 커 통과 산 넘어 산
다중대표소송제·전자투표제도
의견 접근 쉽지만 각론엔 이견
"실리콘밸리처럼 차등의결권 도입"
"이사회 독립성 확보가 선결 조건"
현대차 의결권, 28.3%→8.3% 줄어들 수도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주당 한 표씩 의결권을 부여하지 않고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가령 이사 3명을 뽑는다면 한 주를 가진 주주는 3표를 한 사람한테 몰아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소수 주주도 연합해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배주주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재계는 집중투표제가 이사회 구성원을 이질화해 경영 효율성이 저해된다고 반발한다.
반면 전자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는 상대적으로 통과 가능성이 큰 사안이다. 여야 4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9일 전자투표제 의무화와 다중대표소송제 등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 처리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해 사실상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의견차가 크다.
다중대표소송제란 모회사 주식을 1% 이상 소유한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의 불법 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제도의 취지에는 여야 모두 공감하지만 적용 대상인 모회사의 자회사 지분 비율에 대해 야당은 30~50%, 여당은 100%를 제시한 상태라 좀 더 협의가 필요하다. 2013년 7월 당시 입법 예고된 법무부안은 50%였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20일 법사위 소위 회의에서 “다중대표소송제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라며 “그때도 재계가 반대해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까지 쳇바퀴 돌 듯할 거냐”고 비판했다.
노무현 참여정부 때부터 수차례 개정 시도
상법 개정안에 대해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지난 20일 대한상공회의소 최고경영자(CEO) 조찬 강연에서 “경영 안정성을 위협하는 등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며 “법안을 도입한다면 현재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시피 한 경영권 방어 제도를 같이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이 재계의 반대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이상 2월 국회 처리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상법 개정안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부터 당시 여당(열린우리당)은 다중대표소송제 등을 도입하려 했다. ‘경제민주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박근혜 정부도 2013년 상법 개정안 통과를 시도한 적이 있다. 김관영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자유한국당의 변화된 입장을 촉구한다”며 “경제민주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회사 분할 시 자사주에 대한 신주 배정 금지조항 이 세 가지는 2013년 7월 법무부에서 정부안으로 입법 예고까지 한 내용이지만 그동안 대기업의 로비와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국회가 완전한 여소야대로 흘러감에 따라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전가의 보도’를 다시 휘두르는 것”이라며 “전자투표제 같은 장치만 하더라도 일일이 법으로 강제해야 할 사항인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전자투표제를 법제화한 국가는 대만·터키다. 다중대표소송제를 명문화한 국가는 일본뿐이다. 일본마저도 모회사가 지분 100%를 가진 자회사에만 다중대표소송을 허용한다.
재계의 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초국가적 규모로 움직이는 데 반해 한국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캐나다·싱가포르 등 영미권 법체계 국가들은 기업공개(IPO) 상장 시 차등의결권 제도를 허용하고 있다. 보통주는 주당 의결권 한 개를 갖지만 차등의결권을 갖고 있는 주식 소유자는 주당 10개 또는 100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대륙법체계인 일본도 2008년 상법을 개정해 주당 한 개의 의결권이 부여된 보통주와 달리 여러 주식을 묶어야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단원주(單元株)’를 도입했다.
알리바바, 차등의결권 있는 뉴욕 직상장
단 한 주만 갖고 있어도 적대적 인수합병(M&A) 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도 있다. 보통 공기업이 민영화된 뒤에도 공익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유하는 특별주식으로, 1984년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의 민영화 과정에서 처음 도입됐다.
이 때문에 한국도 신생 벤처기업, 중소기업부터 차등의결권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외국에 비해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수단은 매우 열악하다”며 “포이즌 필은 회사에 손실을 줄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차등의결권과 황금주 제도는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포이즌 필(Poison pill)이란 적대적 M&A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할 경우 기존 주주에게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하지만 경영권 방어 제도가 ‘대기업 총수 1인체제’만 견고하게 할 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은 이사회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제도”라며 “한국 기업의 이사회는 아직 미국 수준의 신뢰를 확보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기업만큼 이사회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일이 선결과제라는 뜻이다. 조명현(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장)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도입에 앞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지, 21세기 한국 기업에 꼭 필요한지 진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SK-소버린 사태
·집중투표제·전자투표제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
·SK㈜ 경영권 방어 위해 주식 매입→주가 급등, 소버린 매도→차익 9539억원 얻어
김경희·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