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행과 야당, 힘겨루기 할 땐가

중앙일보

입력 2016.12.18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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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8차 촛불집회에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즉각 사퇴’ 구호가 나왔다. 주최 측인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황 권한대행은 탄핵당한 대통령의 수족”이라며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무책임한 사인(私人) 최순실과 한 몸이 돼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분노를 슬기롭게 승화시켜 폭력과 탈법이 아닌 민주주의와 법치의 방식으로 박 대통령을 단죄했다. 전 세계가 놀란 평화로운 촛불시위를 통해 헌정사상 두 번째 국회 탄핵을 끌어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헌법 규정대로 박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법의 심판대에 올려놨다. 그런 만큼 이제는 헌법재판소의 심리를 차분히 지켜보면서 ‘포스트 박근혜’와 ‘대한민국 리셋(reset)’의 길을 설계해야 할 때다.


그런데도 일부 재야와 야권은 황교안 체제를 불신하고 비난하다 못해 퇴진을 주장하기 이르렀다. 납득하기 어려운, 무책임의 극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는 “헌법이 무슨 죄냐”며 개헌 요구를 일축하면서 현행 헌법대로 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직무 정지된 대통령의 권한을 황 대행에게 위임해 행사하게 한 게 바로 현행 헌법인데 황 대행이 당장 사퇴해야 한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 3당은 새누리당 친박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대통령 탄핵을 강행해 통과시켰다. 그렇다면 이후의 절차는 법이 정한 대로 따르는 게 상식적이다.


게다가 황 대행체제는 야권이 자초한 결과 아닌가. 국회에 총리 추천을 제안한 박 대통령의 제안을 ‘꼼수’라며 일축하고 탄핵을 밀어붙인 것도 야당이고, 야당끼리 정치적 이해가 엇갈려 일치된 총리 후보감을 내지 못한 것도 야당이다. 어쩔 수 없이 황 대행체제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 느닷없이 물러나라니 이런 주장을 귀담아들을 국민이 몇이나 될지 스스로 헤아려 볼 일이다. 야권은 논리적으로도, 법리적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황 대행 퇴진 요구를 버리고 집권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과도체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옳다. 광장의 촛불과 함성에만 의존해 당리당략을 앞세워 꼼수를 부린다면 촛불 민심의 역풍은 야당을 향해 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황 대행도 낮은 자세로 국민과 국회, 특히 야당을 대해야 한다. 황 대행의 권한은 헌법에 의해 위임된 법적 지위일 뿐이다. 반면 국회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다.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에서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야당의 정통성과 입법·정책의 주도권을 인정해야 한다. 황 대행은 청와대와 숙의하기보다 야당과 협의해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황 대행이 야권이 요구해 온 ‘야·정 협의체’ 구성에 난색을 보이면서 야 3당 대표와 개별 회동으로 대체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건 야당의 불신과 의심을 살 수도 있는 대목이다. 민주당이 “황 대행이 이렇게 불통을 이어 가면 국회 차원에서 (과도내각 구성을) 재고하겠다”고 반발하고 있는 걸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전대미문의 국정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일심동체로 뭉쳐도 모자랄 판에 서로의 입장만 고집하며 샅바싸움을 벌이는 추태를 벌여선 곤란하다.


결론적으로 황 대행과 야당 모두 한 발씩 양보하는 결단이 필요할 때다. 황 총리는 야당이 국정의 핵심 파트너임을 인정하고 주요 현안을 협의 처리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야·정 협의’에 성의 있게 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필요하다.


야당 역시 새로 구성된 새누리당 지도부(정우택 원내대표 체제)와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철회해 국정 안정을 우선순위로 삼는 애국심을 발휘하는 게 좋다. 새누리당 친박계에 대해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에 책임이 있다는 정치적 비판을 하는 것과 당장의 민생 및 국익과 직결된 안보·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은 별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당초의 제안대로 ‘여·야·정 협의체’를 정상 가동해 국정에 책임 있는 정당이란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게 집권 전략에 더 유리하다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미증유의 위기를 맞은 지금은 황 대행과 야당이 누가 더 센지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