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운이 좋아 정시퇴근을 할 때는 거리에서 즉흥적으로 눈에 띄는 곳으로 직행하는데, 대부분은 가벼운 안주와 술을 즐길 수 있는 맥주집이나 이자카야다. 그래서 생긴 에피소드도 꽤 있다. 무심코 들어갔다 ‘섹시바’라는 걸 알고 무안해 하며 나온 적도 있고, 지방에 여행 갔다 감자튀김에 500cc 맥주를 한 잔 시켰더니 직원이 안쓰럽게 바라보며 오징어랑 쥐포를 튀겨준 적도 있단다. “혹시 말을 걸거나 찝쩍대는 남자는 없었어?” “아니,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면 사연 있는 여자로 생각되기 십상이라 의외로 안전해.”
그녀가 말하는 혼술의 아쉬움은 ‘혼자 테이블 차지하고 있기가 미안해 소문난 맛집을 거의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를 가로수길에 있는 ‘쿠이신보’로 불러냈다. 눈치보지 않고 혼술하기 좋은 곳이면서 맛도 있는 집이다. 일본 츠지 요리학교 출신 셰프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합정동에 1호점, 가로수길에 2호점이 있는데 콘셉트는 조금 다르다. 1호점은 일본식 숯불 꼬치구이 전문점이고, 2호점은 고급 재료를 사용해 1인분씩 요리를 내놓는 이자카야다. 매장 가운데에 조용히 식사하기 좋은 다찌(좌석 바)가 준비돼 있다.
셰프에게 ‘혼술녀’를 위한 코스를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청어 사시미를 먼저 권했다. 쿠이신보의 사시미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데 요즘은 청어가 제철이다. 청어는 선도가 중요해 싱싱할수록 고소한 맛을 낸다. 칼집을 격자무늬로 낸 건 뼈를 끊어내기 위해서다. 한입 먹으니 생선살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음~” 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다음은 아주 싱싱해 보이는 해수 우니(성게알) 차례다. 보통 우니는 안전한 보관과 유통을 위해 목판에 올려 가공하는 명반처리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해수 우니는 바닷물에 담근 채 배송된다. 덕분에 선도가 훨씬 좋고 맛도 더 진하고 달다.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우니 특유의 향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술을 부르는 안주들이다. 그렇다면 술은?
셰프가 이번에는 명란구이를 추천했다. 부산에서 공수한 저염 명란을 숯으로 구워 비린내를 없앤 후 참기름을 살짝 발라 고소함을 더했다. 오로시(갈은 무)를 곁들이니 짠맛이 싸악 사라지고 끝 맛이 경쾌해졌다. 점점 속도가 붙은 우리는 셰프를 보챘다. “다음 안주도 얼른 주세요!”
이번엔 차슈다. 닭다리 살을 간장양념에 담가 양념이 잘 배게 한 뒤 숯불에 은근히 구워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달거나 짜지 않아 술안주로 곁들이기 제격이다.
이어서 나온 계란밥은 ‘사진 찍고 싶어지는’ 비주얼을 자랑한다. 간장에 절인 노른자를 밥 위에 얹어낸 뒤 특제 비빔 간장을 밥에 한 번 더 둘러준다. 가격은 부담 없는 3000원! 그녀가 한 입 먹어보더니 “이 계란밥만 있어도 하이볼 2잔은 뚝딱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퇴근 후 간단히 식사도 할 겸 시키기 좋은 메뉴”라고 감탄한다.
쿠이신보 혼술 코스의 마지막은 귀여운 자태를 자랑하는 완두콩 튀김. 완두콩을 갈아 껍질을 벗긴 뒤 생크림·설탕과 뭉쳐서 튀긴 것이다. 히말라야산 암염을 살짝 찍어먹으면 달콤한 맛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멋진 코스를 즐기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그녀. 아무래도 쿠이신보로 매일 출근할 기세다. 혼술도 좋지만 연애에 소홀하면 안 될 텐데, 괜히 알려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
이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