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농사와는 쌀알 한 톨만큼의 관련도 없지만 오며가며 보이는 게 논이다 보니 논농사의 현황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겨우내 휑하던 너른 논바닥이 갈아엎어지나 싶더니 며칠 전부터 일부 논에는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물이 채워진 논이 이렇게나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예로부터 좀 산다는 집 마당에는 으레 연못 하나쯤 파 놓게 마련인데,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돌확이라는 큼지막한 돌수조를 갖다 놓고 물을 채워 연못 기분을 내기도 했다. 비록 물 그릇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찰랑찰랑 돌 그릇 가득 채운 물 위로 비친 세상은 더없이 감미로울 따름이니 나름 꽤나 효율적인 장치가 아닌가 싶다. 선인들이 그렇게라도 만나려 했던 물빛을 요즘은 집 밖에만 나가면 맘껏 누릴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호사스러운 봄인가.
온 가족이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차는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뚝방길을 달렸다. 뒷자리 아이들이 소리쳤다. “꼭 물 위를 흘러가는 배 같아요!” 우리는 차에서 내려 논길 사이를 거닐었다. 모내기를 하기 전 물이 채워진 논은 밤하늘을 담은 티끌 하나 없는 캔버스 같았다. 그건 올려다보는 밤하늘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여린 밤바람이 수면을 흔들었다. 식구들이 앞서가는 동안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한없이 가냘프게 흔들리는 거대한 어둠. 밤바다가 내 곁에 있었다. 잠시 후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기울어 가는 달 두 개가 걸음에 맞춰 우리를 따르고 있었다.
이장희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의 저자. 오랫동안 동경해 온 전원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과 파주를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