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1988년 넥스트 큐브 런칭샌프란시스코의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 매킨토시의 실패로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는 넥스트로 화려한 복수극을 준비한다. 디자인적으로 한층 완벽에 가까워진 큐브는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던 이들을 열광케 한다. 허나 새 제품을 소개하는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다. 매킨토시 런칭 때처럼 그와 얽힌 악연을 풀고자 하는 이들이 줄이어 무대 뒤 대기실을 찾는다. 애플의 동업자이자 잡스의 절친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세스 로건)은 묻는다. “잡스는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하는 데 왜 하루 종일 ‘잡스는 천재’라는 기사만 뜨느냐”고. 잡스도 묻는다. “메트로놈과 지휘자의 차이를 아느냐”고. 당신이 악기를 제일 잘 연주하는 뮤지션이라면 자신은 그 오케스트라 전체를 총괄하는 지휘자라고 말이다.
3막. 1998년 아이맥 런칭 데이비스 심포니홀. 검은 슈트로 멋을 낸 모습 대신 친숙한 터틀넥에 청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잡스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다. 제품에 대한 자신감과 이제는 확고해진 스타일이 주는 안정감이랄까. 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암전을 위해 비상구의 불까지 신경쓰고 노고를 칭찬해달라는 동료의 간청도 가뿐히 흘려듣는 탓에 그간 이 좌충우돌 외곬수를 보좌해온 조안나 호프만(케이트 윈슬렛)도 백기를 든다. 애플의 전 CEO인 존 스컬리(제프 다니엘스)는 물론 딸 리사와의 갈등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본인도 이제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토록 파격적인 연출이 가능했던 것은 드라마에 강한 대니 보일 감독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가 트레이드 마크인 아론 소킨의 각본 덕분이다. 이들은 잘 알려진 잡스의 영광을 과감하게 생략했고, 주변 인물과의 갈등과 3번의 분기점에 집중했다. 상대방과 오고 가는 대화는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었고, 상황을 한층 깊이있게 후벼팠다. 캐릭터가 살아남은 물론이요, 좁은 무대 뒤편은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녹아든 한없이 넓은 공간이 됐다.
우리는 다들 잡스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만든 아이폰으로 통화를 하고, 그가 만든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그가 만든 맥으로 일하는, 그야말로 그가 창조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또한 착각 아닐까. 우리가 아는 건 그가 만든 제품이지, 그가 안고 있는 고민은 아니었으니까. 실은 그 역시 아내 앞에 서면 못난 남편이고, 딸에게는 한없이 매정한 아빠이며, 동료들에게는 종종 아니 자주 지탄받는 평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흠이 많은 인간이기에,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도리어 더욱 완벽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0일(현지시간) 열린 제 73회 골든 글로브에서 여우조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21일 개봉.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UPI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