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 뮤지컬 시장은 눈에 띄게 조용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경쟁적으로 대형 신작을 터뜨리며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던 업계가 올해는 검증된 흥행 레퍼토리들로 각자 실속을 챙기는 모양새다. 초연 30주년을 맞은 대작 ‘레미제라블’을 비롯해 국내에서만 12번째 시즌을 맞은 쇼 뮤지컬 ‘시카고’, 매니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등 면면도 다양하다. 신작이라곤 황정민 연출·주연의 일본 라이선스 뮤지컬 ‘오케피’ 단 한편이다. 따끈한 신작에 목마른 뮤지컬 팬들에겐 다소 김빠지는 겨울이지만, 재연작들도 저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달라진 모습을 어필 중이다. 한번쯤 봤던 무대지만 올 겨울 버전의 달라진 관전 포인트를 짚어봤다.?
원작 무대에 없는 ‘타라의 테마’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형식으로 삽입해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영상으로 막을 연다. 프랑스 뮤지컬 특유의 예술적 안무를 대폭 축소하고 스토리의 밀도를 높였다. 코르셋을 조이고 커텐으로 드레스를 만드는 영화 명장면 열전은 여전하지만 오히려 얼마나 영화와 가까운지가 관전 포인트다. 영화와의 차별성을 외치기보다 철저히 영화에 기대고 있는 무대인 것이다. 싱크로율 높은 캐스팅이 관건인 이유다. 데뷔 이래 처음으로 장발을 싹둑 자른 신성우가 상남자 레트 버틀러에 딱 어울린다.
관객 대부분이 20~30대 여성인 상황에서 훤칠한 외모에 가창력까지 폭발하는 남자배우는 무대 위 다다익선인 법. ‘프랑켄슈타인’은 여주인공의 비중을 확 줄이고 창조주 빅터와 피조물의 관계에 과감히 브로맨스 코드를 택했다. 표면적으로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대결구도지만 복수의 드라마 이면엔 두 친구의 우정을 넘어선 애정이 흐른다. ‘간지폭발’ 제복 자락을 휘날리는 빅터와 대체로 헐벗고 등장하는 앙리의 야성미, 완급조절을 잊은 듯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두 남자의 노래에 공감각적 호사를 누린다. 커튼콜엔 두 남자 주인공이 ‘바람사’ 급 허리꺾기까지 구사한다. 초연 배우 유준상·한지상·박은태에 더해 뉴캐스트 박건형·전동석 등 다양한 조합의 케미로 회전문을 유도한다.
그가 뮤지컬 데뷔전에서 선택한 역할은 1940년대 파리의 소심한 우체국 직원 듀티율. ‘응답하라 1994’ 이후 급부상한 블루칩 배우에게 폼나는 역할은 아니지만, 유연석은 찌질한 소시민 듀티율을 샤방샤방 미소와 비장의 훤칠함으로 훌쩍 업그레이드시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송스루 뮤지컬임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훈훈한 가창력. 반짝스타가 아니라 내공있는 배우임을 실감하며 무대에서 자주 만날 기대감에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알콜중독 의사이자 경찰, 교도소장, 변호사 등 온갖 코믹캐릭터를 한몸으로 소화하는 고창석도 매력덩어리다
짝사랑에 신음하는 ‘유리멘탈’ 청년 베르테르가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노인 만큼이나 노련해 보인다는 게 함정. 그러나 조승우는 역시 조승우다. 실제 첫사랑에라도 빠진 듯 해맑은 표정의 메소드 연기에 손발을 오그리다 대사인 듯 노래인 듯 감성 돋는 넘버에 넋을 놓게 된다. 베르테르의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해바라기 만발 무대와 15인조 실내악 오케스트라의 서정적인 연주도 로맨스 감성을 부채질한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각 제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