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마다 편법 지출 횡행 … 미계획 사업에도 버젓이 전용

중앙일보

입력 2015.11.01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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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강일구


#국회는 2013년 말 정부가 제출한 2014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저소득층 기저귀·조제분유 지원 시범사업으로 50억원을 신규로 포함시켰다. 이 사업은 당초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취임 후 국정 과제로까지 선정된 사안이었지만 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그러자 새정치민주연합이 나서 이 사업을 10대 증액 예산으로 추진하면서 되살아났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예산이 반영된 이 사업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정부가 예비타당성 조사가 지연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연구개 발비로 우선 쓰였던 4800만원을 제외한 전액 (49억5200만원)을 한 푼도 쓰지 않았기 때문 이다.


국회는 지난달 28일부터 2016년도 예산안 심의에 돌입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예산 확보 전쟁이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야 간, 또 정부와 국회 간 치열한 신경전을 거쳐 확정된 예산이 당초 계획대로 쓰여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의 방만한 예산 운용 백태를 점검해봤다.


일반회계 이용·전용액 연 1조원


책정된 예산을 제대로 쓰지 않는 ‘불용률’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것(그래프 참조)은 대부분 사업 계획이 미흡하거나 사업 관리가 부적절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항공 분야 국제 공동개발사업 의 경우 매년 수십억원대에 달하는 불용 예산이 상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업이다. 2011년부터 추진된 중형 항공기 개발 사업은 해외 협력사업이 세 차례나 중단되면서 4년간 예산 불용액이 385억9500만원에 달한다. 지난해 착수한 소형 무장헬기 기술개발사업 역시 해외 업체와의 협상 기간이 연장되면서 예산 20억원이 쓰이지 못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이에 대해 “국제계약 체결을 전제로 추진하는 사업은 다양한 요인을 반영한 면밀한 사업계획을 우선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예산 집행에서 또 다른 문제로 지적되는 유형은 이미 책정된 예산을 다른 사업으로 바꿔쓰는 이용·전용이다. ‘이용’은 사업의 주요 내용이나 규모를 변경하는 것이 고, ‘전용’은 예산 집행 과정에서 부분적인 계획이 변동되거나 여건이 바뀔 때 재량에 따라 융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회계 기준 이용·전용액 규모는 2010년 1조5020억원에서 지난해 9350억원으로 다소 줄어들었지만 최근 5년간 매년 1조원대 안팎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효율적인 재정 운용을 위한 조치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예산의 이용·전용은 변동 사유와 내용을 명확히 밝혀 기획재정부 장관의 승인을 얻으면 예외적으로 허용되지만 사후 국회에 반드시 보고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절 차는 무시되기 일쑤다. 행정자치부는 2013년 6월 주민서비스 포털의 운영을 종료할 예정이었지만 2014년 예산안에 버젓이 관련 예산 4억8100만원을 그대로 편성했다. 결국 2014년 1월 포털 운영이 종료되면서 관련 예산이 불필요해지자 이 예산 중 일부를 떼내 ‘비영리 민간단체 관리정보시스템’ 유지 보수 사업에 2억6100만원을 지출했다. 사업 내용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기존 예산과 관련 없는 사업에 전용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용한 것은 엄연한 국가재정법 위반”이라고 밝혔다. 대형 사회간접자본 (SOC) 사업이 많은 국토교통부나 해양수산부도 설계나 인허가 지연 등을 이유로 기확보된 예산을 다른 목적으로 쓰는 경우가 매년 반복되고 있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고 있지 않다.


예산에 없던 신규 사업을 추진하는 것 역시 엄격하게 금지돼 있지만 이 또한 행정 일 선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해 당초 예산안에 없던 ‘국방조달혁 신 연구용역’ 사업을 정보체계 사업 예산에서 16억900만원을 전용해 맥킨지 한국지사 에 신규로 맡겼다. 국토부도 ‘주택가격 동향 조사’ 위탁사업비에서 1억2000만원을 자체적으로 전용해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 연구’ 를 실시했다. 이 두 사업 모두 국회 예산정책처로부터 “시급하지도 않고 내용면에서도 부적절한 전용”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무턱대고 예산도 없이 사업을 진행해놓고 사후에 다른 예산으로 틀어막는 경우도 허다하다. 경찰청은 지난해 당초 예산안에 없던 ‘사이버 교육포털 고도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1억5000만원을 전용했다. 이 바람에 당초 계획됐던 경찰관 채용·승진시험 운영비가 부족해지자 시간외 근무자나 휴일 근무자에게 식비로 지급할 특근매식비 일부를 떼내 충당 했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명백한 국가재 정법 위반 사례지만 현실적으로 국회에서 이를 제재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며 “결국 국회의 예산·결산 심의권이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효율적인 예산 집행을 내세워 예산을 이처럼 마음대로 쓰고 있음에도 정작 정 부의 재정운용 효율성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기영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가 최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공청회에서 발표한 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재정운영 관리운영비는 전년 대비 6.1% 늘어난 22조7000억원을 기록한 반면 공공서비스의 크기(프로그램 순원가)는 2.8% 줄어든 263 조원을 기록했다. 김 교수는 “정부의 재정 운영에 들어간 비용은 늘어난 반면 효과는 줄었다”고 지적했다.


‘조기 결산제도’ 도입 시급


예산 마음대로 쓰기 관행을 불식시키기 위해선 예산 집행 사업의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는 제도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일단 시작된 사업은 장기간 지속되는 연유로 관련 예산이 한 번 신규 편성되면 이후엔 대부분 물가상승률에 맞춘 액수가 계속 확보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결산 평가를 신규 예산 편성 이전에 끝나야 한다는 이른바 ‘조기 결산론’까지 나온다. 강병구 인하대 교수는 “사업 타당성을 원점에서 검토하지 않고 관행대로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예산을 점점 더 많이 신청하게 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산 정책처 관계자는 “현행 예·결산 심의 과정은 사업 성과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너무 취약하다”고 밝혔다.


결산 평가기관의 독립성 확보도 관건이다. 영국은 의회 산하의 회계감 사국(NAO)에서 결산과 회계 검사를 실시하고, 결산위원회는 이를 바탕으로 예산 사업의 성과 분석 보고서를 작성해 각 상임위에 보고한다. 일본의 경우 중의원 결산행정감시 위원회와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집행 관련 조사를 상시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들 감사기관은 모두 행정부로부터 완전 독립돼 있는 게 특징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예산정 책처장은 “한국의 현 결산 체제는 환자(행정 부)가 스스로 수술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국회에서도 최근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국민이 낸 세금을 올 바르게 썼는지도 중요하다”며 결산 조기 심사를 주장해왔다. 박광온 새정치연합 의원은 국회법 등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부 예산안에 대한 국회의 지적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하고, 국회에 제출하는 결산 서류에 구체적인 사업 내용과 집행 내역 등을 반드시 명시하도록 했다. 박 의원은 “쓸 돈(예산)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심사하는 반면 쓴 돈(결산)에 대해서는 부실하게 심사해 온 국회 제도 를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