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제가 머물던 저승전 후문인 융효문 바깥에는 군물고가 있잖아요. 무기들을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었어요. 손재주 좋은 한상궁이 종이나 나무로 칼과 활을 만들어주고 무예도 가르쳐 주었지요. 어느 날 마당에서 어린 나인들과 장난감 칼을 갖고 노는 저를 보고 물었지요. 그래 공부는 다 하고 노는 것이냐? 저는 네 라고 대답하였지만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찼습니다. 공부에 끝이 없거늘 어찌 그리 가볍게 말하느냐. 아버지가 그러실수록 저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책만 펴면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지금처럼요.
아버지는 참 검소한 분이지요. 침전에는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가 전부였고 잡곡밥과 거친 소찬을 즐기고 항상 소식하였으니까요. 아버지와 달리 저는 식탐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아끼시어 맛난 음식이 있으면 항상 챙겨 주셨는데 이 뒤주 속에 있으니 그 음식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네요. 아버지는 제가 항상 많이 먹는다고 못마땅해하였지요. 많이 먹었으니 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제 배를 두고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놀리셨지요. 이 아이의 배를 한번 보시오. 지난번 가마 탈 때 보니까 가마가 좁아서 타지 못하더군요. 내가 서른 살 무렵까지 타던 가마였는데 이제 겨우 열두 살 아이가 말이오.
아버지는 눈물의 임금입니다. 자주 우셨지요. 곡식 낟알 하나하나가 모두 일하는 이의 고생 속에서 생산되며 실 한올한올이 가난한 여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잔인하지 않겠는가 하며 백성을 걱정하고 민간의 고통을 가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자식의 고통 앞에서는 이처럼 냉정한 것입니까?
아버지는 제 옷차림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했습니다. 살이 있으니 아무래도 옷이 잘 안 맞았겠지요. 단정하게 입어도 어딘지 반듯하지 못해 보였겠지요. 그러면 그것을 두고 또 비난했습니다. 점점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옷을 입을 때면 예민해져서 몇 번이나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아버지, 왜 하필이면 뒤주인가요? 형벌은 반드시 죄목과 연동되니까, 목을 베거나 사지를 찢거나 사약을 내리면 그것이 역모죄의 형벌이니까, 저의 역모죄를 피해야 제 아들에게 ‘역적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어느 법전에도 없는 형벌로 죽이려 한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관에 가둬 죽여도 되잖아요. 이게 뭐에요.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이 거구의 몸을 비좁은 뒤주 속에 어떻게 넣어요. 못 먹는 건 참는다 쳐요. 똥 오줌은 어떻게 해요? 일국의 왕자인데,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장인데, 문명인인데. 이 윤 5월 무더운 여름 날씨에. 이런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이거 다 쇼죠? 한 며칠 가둬두면 중신들이며 종친들이 간청할 테니 그때 못이기는 척하고 풀어주려는 거죠? 제발 그러지 마요. 이런 전시행정, 정치쇼 이제 식상해요.
자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나요. 경전을 읽는 것보다 시 짓고 그림 그리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먹는 것을 좋아해서 뚱뚱해진 자식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나요.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모습을 내 틀에 맞추고자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감정기복도, 콤플렉스도, 식성과 기호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째서 저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아버지의 기대와 욕심에 가두려 하셨나요? 제 기질과 식성과 재능을 아버지의 뒤주 속에 가두려 하셨습니까?
아버지, 나 뒤주 속에 있어요. 벌써 칠일째라니까. 아버지, 나 잊으면 안 돼.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