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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면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마돈나’는 식물인간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마돈나의 과거 삶을 통해 지금의 우리 사회,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가를 고발한다. 아,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고발조차 안쓰럽고 끔찍해진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와있는지 자괴스럽기가 그지없어진다.
영화 ‘마돈나’
여자는 무연고자 처리돼 방치된 상태였는데 이미 만삭인 상태다. 여자의 이름은 미나(권소현). 아들은 조무사 해림에게 그녀의 친인척을 찾아 어떻게든 장기 기증 각서를 받아 오라고 명령한다. 해림은 미나의 흔적을 찾게 되고 점점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알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리 자본주의라 하기로서니 이렇게 악랄하고 비열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든다. 이건 너무 끔찍한 면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닐까. 현실은 이것과는 좀 더 나은 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 것인가. 이 영화는 현실의 비현실성을 그린 내용인가 아니면 비현실의 현실성을 그린 작품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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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현실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부자들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란의 몸짓은 실제로 끝간 데가 없다. 뚱뚱한데다 가슴만 크고 못생긴 여자들, 게다가 못 배우기까지 했을 경우 이들이 일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해 봤자 자본주의 내 소시민들의 삶이 어디서, 어떻게, 또 얼마나 빨리 추락할 수 있는지, 그것 역시 매일처럼 목격하는 일이지 않는가.
영화 속 마돈나 역시 콜센터 여직원에서 화장품 제조회사 직원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창녀촌의 ‘삐끼’로까지 전락해 간다. 누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과연 누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해림의 시선을 좇아 ‘미나=마돈나’의 삶을 추적하고 또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해괴한 음모를 들춰 내게 한다.
영화 ‘마돈나’는 장 폴 사르트르가 썼던 『구토(嘔吐)』와 같은 느낌을 준다. 실존을 자각하는 순간 구토를 하게 됐던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처럼 당신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의식의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옳다. 이 영화를 만든 신수원 감독이 의도했던 것 역시 바로 그 지점에 있을 것이다. 우리보다는 칸 영화제가 감독의 생각을 정확하게 포착해 냈던 듯이 보인다. 영화 ‘마돈나’는 지난 5월 제 67회 칸 영화제의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돼 상영됐다. 이제는 우리가 이 영화를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때이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리틀빅픽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