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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바이올린 소나타를 이것저것 찾아 들어 보는데 마음에 드는 연주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대에 맞는 연주를 찾았는데 그게 정경화 연주였다. 점묘화가 그렇듯 음 한 조각만 비틀려도 전체가 어색해진다. 참으로 섬세하고 정확하고 앙칼진-긍정적 의미로-프레이징으로 끌고 가는데 두 악기의 다툼이 상쾌감을 자아낸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드뷔시 곡을 계기로 정경화 연주를 다시 들어본다. 그에 관해 대강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큰 착각이었다는 걸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초기를 제외하고 그는 한국 무대에도 자주 선 걸로 아는데 불행히도 나는 한 차례도 객석에서 그의 연주를 실연으로 듣지 못했다. 아마 그가 한창 뻗어오르던 시기는 내가 십여년 엄혹한 궁핍의 시기를 보낸 시간과 겹칠 것이다. 정장을 갖추고 음악회에 입장하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그러나 마음은 연주회에 가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브루흐의 협주곡을 비롯, 다수의 음반을 일찍부터 구입해 들어온 것이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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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상급 악단과 연출해낸 협주곡 무대는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많다. 1983년 리카르도 샤이 지휘의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협연한 드보르작 협주곡 연주도 넘치는 활력, 빈틈이 전혀 없는 완벽무대라는 점에서 인상에 남는다. 어느 정도 관록이 쌓인만큼 그의 동작도 부드러워지고 아기자기한 3악장 악구를 스스로 즐기는 여유마저 보인다.
그는 협주곡에 강하다. 차이콥스키건 브루흐건 바르토크건 언제나 완벽무대를 연출해낸다. 협주곡에 강하다는 것은 큰 무대에 강하다는 것이고 오케스트라와의 일치감을 위해 자기 모든 열정을 거기 바친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활을 잡고 얼마나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지 그 모습을 보노라면 손에 땀이 난다. 그는 팔과 손으로만 연주하지 않고 온 몸으로 연주한다. 오직 정확하고 간결한 한줄기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쏟아내는 열정 앞에 잠시 숙연해진다.
오래 전이라 명확하진 않으나 그가 유학 초기에 자신은 서양 경쟁자들에 비해 손이 작고 팔도 짧아 도저히 경쟁이 될 것 같지 않아 숙소에서 혼자 울었다는 기록을 읽은 것을 기억한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몹시 애처로운 기분에 젖었다. 그는 동양인의 그 작은 손과 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토록 온 몸의 힘을 쏟아 연주하는 습관을 기른 것인가. 지금 정상에 선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이 터무니 없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 사례에서 보듯 정경화는 고전과 낭만뿐 아니라 바르토크, 베르크, 라벨 등 현대음악에도 강한 면을 보인다. 라벨의 소나타 No.2에서 조용한 정경의 한 순간을 정갈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그가 세밀화에 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1995년 현대작곡가 피에르 불레즈의 70회 탄생기념 음악제에도 바렌보임, 폴리니 등과 함께 초빙되어 바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연주로 갈채를 받은 바도 있다. 그만큼 현대음악 해석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Return to London’, 정경화 연주를 듣다가 우연히 만난 연주의 명칭이다. 그는 런던 페스티벌 홀의, 무대가 아닌 객석 통로 복판에 서서, 당연히 청중 없는 빈 공간에서 바흐의 ‘샤콘’을 15분 동안 열연했다. 자신이 절정기를 보내던 주무대일 것이다. 몇 해만의 귀환인지 모르지만 이 연주가 들려주는 얘기가 많다는 걸 느꼈다. 15분간 이 음악을 듣고 나면 마치 곡절많은 삶의 긴 회랑을 거쳐온 것 같은 깊은 감회에 젖게된다. 여왕에게도 곡절은 있기 마련이다. 그도 스스로 위안과 다짐을 얻기 위해 이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는 바흐 음악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바흐 연주에 뭔가 미진하다고 느꼈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가 바흐 음악 연주에도 더욱 열정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송영 작가 sy4003@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