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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소망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는 기성대국 미국과 신흥대국 중국 간 세력전이가 평화적으로 이뤄져 역내 중견국·약소국이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며 공존 공영하는 세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란 슬로건처럼 미국이 중국과 평화적으로 경쟁하고 협조하는 길이 열리지 않으면 주변부는 괴롭다.
한·일 관계 정상화 시급한 까닭
여기서 한·일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일 관계가 양호하면 미·일의 중국 견제 수위가 적절히 하향할 수 있고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활동공간도 넓어진다. 그러나 한·일 관계 악화로 현실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고 비판하며 미·일 동맹의 끈을 조이고 있고, 중국은 이를 틈타 한국을 끌어들이려 하며, 미국은 한국을 서서히 압박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미·일 두 고래가 만드는 파고 속에서 표류하는 새우 신세가 되는 것이다.
한·일 관계 악화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부정적이다. 단순히 투자와 관광인원 축소 정도가 아니라 지역 질서 차원에서 한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력판도를 보면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 앞서 가고 있고 중국이 RCEP(지역포괄경제협정)와 한·중·일 FTA 등으로 반격하는 양상이다. 한국은 TPP에 참가하는 동시에 RCEP와 한·중·일 FTA 교섭을 진전시킴으로써 두 네트워크가 향후 통합될 수 있도록 중견국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일 관계 악화는 이런 시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일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나빠질 수 없는 관계다.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다양하고 깊은 이익을 공유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친숙해 긴밀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봐도 과거사 여러 문제로 때론 얼굴은 붉히지만 복원력 역시 강하다. 현재 최악의 관계를 겪고 있다지만 불과 3년 새 일어난 일이라 앞으로 하기에 따라 급속도로 회복될 수도 있다.
현재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당부하고 싶은 건 목표가 단지 관계 회복과 정상회담 개최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한·일 관계는 이미 과거사를 푸는 정도의 양자관계 외교사안을 훌쩍 넘어 지역질서 변동에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냉철하고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과거사를 풀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단선적 사고를 넘어 미래 속의 과거를 상상하며 공생과 공영의 신(新)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차원에서 대일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