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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30여년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을 지낸 필립 드 몬테벨로는 답을 알고 있다. 이 책은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필립과 세계의 유명 미술관을 순례하며 미술과 관람객의 관계, 예술감상이라는 행위의 문제를 논한 책이다. 텍스트를 파고드는 흔한 미술비평서와 달리 작품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담론들이 신선하다.
『예술이 되는 순간』
필립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보쉬의 ‘쾌락의 정원’이 “사건들로 활기가 넘치고 뛰어난 세부묘사로 가득하다”면서도, 유독 이 그림에만 몰린 10여명의 군중 탓에 10여 초만에 자리를 비켰다면 작품은 뛰어난 세부묘사가 소용없는 그저 이미지가 된다고 꼬집는다. 하물며 늘 100여 명의 인파가 몰려있는 루브르 모나리자에 이르면 실상 작품은 못 본 것이나 다름없다.
가장 뛰어난 미술작품들이 가장 번잡한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는 게 미술관의 역설이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이뤄지는 마법과 같은 고요한 대화는 그 작품을 보려는 많은 이들의 열망과 영원한 갈등상태다.
그렇다면 복제기술로 대체할 수 있을까? 기술의 발달로 원본 앞에서 불가능한 세밀한 수준이나 확대된 세부묘사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발터 베냐민의 ‘아우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빌 게이츠가 1994년 세계의 미술작품을 담은 디지털 기록보관소를 만들기 위해 다빈치의 ‘레스터 사본’ 원본을 3000만 달러를 주고 구입한 사례가 명백한 답을 준다.
복제불가능한 원본성의 대표적 작품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작품 앞에 서면 ‘작가가 폭발하는 힘으로 물감을 기적과 같이 변형한 바로 그 작품’이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작품에 담긴 영혼과 함께 ‘물감의 표면’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20년전에 본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을 다시 보려 사망 18개월전 전시장을 찾은 뒤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다. 소설 속 평론가 베르고트는 그림 앞에서 현기증을 경험하며 죽는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경사진 지붕이 있는 노란 벽의 작은 부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감동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이제 푸르스트나 베르고트 같은 경험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늘 인파에 둘러싸인 ‘델프트 풍경’ 앞에서 ‘기절해서 홀로 죽을 만큼 황홀한 순간’을 그 누가 맛볼수 있을까. 어쩌면 ‘예술이 되는 순간’은 아무도 멈춰서지 않는 이름없는 작품 앞에서 스스로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