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20 <끝> 큰 그림 그리는 CEO형 리더 … 일각선 “독선적” 비난도

중앙일보

입력 2015.03.08 02:19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전통의 술 막걸리 대신 와인을 내세우며 ‘민족 고대’의 글로벌화를 추진했던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 비전을 제시하고 성과를 중시하는 추진력을 보였으나 일처리가 독선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중앙포토]
2005년 5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고려대가 선보인 와인. 프랑스 메독 지방에서 2000년 생산된 ‘샤토 라 카르돈(Chateau La Cardonne)’이다.
1997년 말 찾아온 외환위기는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실감나게 했다. 글로벌 시대 선진국이 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너도나도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대학가에는 반미·자주 분위기도 상존해 있었다.
2004년 봄 내가 몸담은 신문사 편집국과 고려대 주요 보직교수들과의 회식이 서울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어윤대 총장이 들고 온 와인에 쏠렸다. ‘어, 막걸리대 총장이 웬 와인을….’
당시만 해도 와인은 회식 자리에 생소한 술이었다. 더구나 “100원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책을 사 보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고,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마신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고대를 상징하는 술은 막걸리였다.
어 총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희는 조국을 등지고 민족을 버렸습니다.”
평소 ‘민족 대학’임을 강조하는 고대 총장의 말치고는 의외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소국 시절 ‘민족’은 좋은 의미였지만,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완고하고 편협한 개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 대학들도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려면 국내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와인이 상징하는 글로벌화와 품격을 민족적 정서가 강한 저희 대학에 접목시키려고 합니다.”
이 말에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어 총장은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삼성이 소니를 제치고 세계 최고 기업이 됐듯이, 앞으로 한국 대학 중에서도 예일이나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학이 반드시 나올 겁니다.”
그 말에 모두 박수를 쳤다.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민족’을 넘어 ‘글로벌’을 위하여 건배!”
대학 총장이 보직 교수들을 이끌고 언론사 실무 간부진과 만나 격의 없는 태도로 이해와 설득을 구하는 모습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다. 그런 식으로 어 총장은 언론을 우호세력으로 만들어 나갔다.

“국문과도 외국인 교수 뽑아라”
2003년 2월 제 15대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한 어윤대는 세 가지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전통과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집시다.”
“내부 지향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진취적 민족주의로 나갑시다.”
“교육과정, 내용, 시설 모든 것을 세계 최고로 만듭시다.”
이 말은 사실 우리 대학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내로라하는 우리 명문 대학들은 그동안 양적(量的) 성장에 비해 질적(質的)으로 낙후돼 있었고 국제 경쟁력은 형편없었다. 세계 100위권은 물론, 아시아에서조차 10위권 밖으로 밀려 나 있었다.
어윤대가 내건 캐치프레이어즈는 ‘글로벌 고대 계획(Global KU Project)’이었다.
교육·연구·시스템·인프라·의식 등 모든 것을 세계 수준에 맞게 혁명적으로 바꿔 2010년 세계 100대 대학으로 진입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국제화가 필수적이었다.
우선 담당 처장을 비롯한 직원들을 하버드·예일·스탠퍼드 등 미국 유명대학에 벤치마킹을 보냈다. 현황조사와 현장 답사를 원칙으로 했다. 분석결과 나온 해답은 ^영어(원어) 강의 확대 ^해외거점 대학 구축 ^국제하계대학 육성이었다.
영어 강의는 대학 경쟁력의 척도다.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명문대는 강의를 100% 영어로 한다. 자존심 높은 프랑스의 파리 제10대학도 영어강의 비율이 50%를 넘었다.
고려대는 국내 대학 중에서 영어 상용화를 가장 먼저 선언했다. 일반 교과목 강의 상당수를 영어로만 하고 외국인을 정식 교수로 채용했다. 학내의 반발은 엄청났다.
“민족 고대가 왜 영어 공용론을 들고 나오나?”
“영어로 하면 강의 질이 떨어진다.”
“한국 문학이나 국사도 영어로 강의하잔 말이냐?”
그러나 어 총장은 끄떡하지 않았다. 도리어 국어국문학과 교수들에게 “영어 강의가 어려우면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라”고 했다.
“한국학이 전 세계에 확산되려면 한국어만 갖고선 안 된다 영어를 통해 외국인들이 쉽게 한국을 배우도록 만들어야 한다.”
2004년부터 본격화된 영어 강의 비율은 1학기 17.9%, 2학기 21.9%로 확대됐다.
국제화의 두 번째가 해외 거점대학 구축이었다. 고려대생 2000명이 매년 외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면 미국·캐나다·영국·호주·중국·일본 등의 대학들과 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비싼 선진국 학비, 기숙사 확보, 안전문제 등 고려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대 학교도 한국에 과연 같은 규모로 학생들을 보낼 수 있느냐는 것도 관건이었다.
어 총장 이하 대학 간부들이 직접 현지 대학을 방문해 설득했다. 처음에는 “2만5000달러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못 받겠다”고 완강하게 거부하던 미국 UC데이비스대를 비롯 영국 런던대, 중국 린민(人民)대, 호주 그리피스대 등이 결국 교류를 수락하면서 협정에는 속도가 붙었다.

‘열정맨’ 어윤대

보직 교수에 힘 실어주며 대학 개혁
‘교육은 돈이다.’ 이 모든 것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기금이 중요했다. 당시 고려대의 발전기금은 하버드대(28조원)의 1%(2800억원) 수준에도 못 미쳤다.
어윤대는 평일 하루 4시간 이상씩 발전기금을 모으기 위해 발로 뛰었다. 한번 아니라 보통 서너 번씩 찾아가 1대 1로 만났다. 주말이면 골프 등을 치며 기업인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대학 행정은 부총장 이하 보직 교수들에게 맡겼다. 취임 초 간부회의에서 그는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 교수 인사권과 예산권을 단과대에 넘긴다. 총장이나 재단이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대신 목표 관리를 한다. 논문 숫자, 국제화 정도를 계량화해 책임을 확실히 지우도록 하겠다.”
이른바 대학에 기업처럼 목표관리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대학 안 살림은 부총장 이하 단과 대학장 및 보직 교수들이 책임졌다. 어총장은 부총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중요 사항의 경우 부총장을 부르지 않고 직접 부총장실로 찾아가 만났다. 4년 내내 그랬다.
어 총장에게는 자기 사람이 없었다. 취임 후 그는 전임총장 시절 사람들을 거의 유임시켰다. 업무 연속성 때문이었다 임기가 끝났으나 잘했다고 평가되면 유임시켰다. 새로 선발하는 사람도 철저히 평판과 능력에 의해 임명했다. 상당수 보직교수가 어 총장과 단둘이 식사 한번 한 적 없는 사이였다.
보수성이 강하기로 소문난 고려대학교 내의 이런 변화는 화제가 됐다. 일부 언론에서는 ‘고대는 혁명중’이라고 보도했다.
2005년 11월 영국 ‘더 타임스’가 선정하는 ‘세계 200대 대학’에서 고대가 사회과학분야는 66위, 인문분야는 89위에 랭크됐다. 전체 순위는 184위였다. 고려대가 아시아 사립대학으로는 최초로 일본 명문 와세다대와 게이오대까지 제치고 종합랭킹 세계 200위권 안에 진입한 것이었다. 인문사회계열에서는 이미 100위권 안에 진입했다.
국제적 지명도가 높아지자 외국 대학들이 제 발로 찾아 왔다. 과거 교류에 난색을 표하던 싱가포르 국립대(세계 22위·2005년) 시춘퐁 총장이 교류 협력을 먼저 제의했다. 이렇게 해서 2006년 싱가포르대와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72위)대 등 3개 대학 간 교류협력사업이 시작됐다. 기금은 계속 늘어났고 학교 인프라 확충도 절정에 달했다. 2006년에는 대학 서열이 2005년보다 34계단이나 수직상승해 세계 150위 대학이 되었다.

대부분 국내 대학들 고대 벤치마킹
그러나 학교 내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개혁에 따른 교수들의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어 총장의 직선적인 언행과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도 작용했다.
“너무 급하고 일방적이다.”
“소통은 없고 독단적으로 처리한다.”
2006년 11월 치러진 제 16대 총장 선거에서 어 총장은 재선에 실패했다. 교수들의 ‘네거티브’ 인식이 작용했다. 언론에서는 ‘어 총장의 실패한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개혁에는 성공했으나 구성원의 반발에 부딪혀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뉴스위크는 영어공용화를 지적했다.
그의 3년 10개월 재임 중 국제화는 많이 이뤄졌다. 영어 강의는 35%로 늘어났고 한해 1700명의 학생이 외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갔다. 국제하계대학의 경우 취임 전 불과 20명에 불과하던 구미지역 대학생 참가자는 1500명을 넘겼다. 학생 파견 프로그램은 총 56개국 596개 대학 및 기관으로 확대됐다.
학교 발전기금은 연구비 포함 4700억 원을 모았다. 4년간 320명 신임교수가 채용돼 30% 늘어났고, 교수 연구 논문도 배로 증가했다. 기존 20만 평 대비 8만 평(40%)의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어윤대가 추진한 많은 개혁·발전 조치를 대부분의 국내 대학들이 벤치 마킹해 따라갔다는 사실이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그는 국가브랜드 위원장을 거쳐 2010년 KB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했다. 낙후된 한국 금융계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금융계의 적폐인 외부 인사 개입이나 특혜 대출과 관련, 스스로 방패막이가 되려고 했다. 재임 중 단 한 건의 대출이나 인사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고, 정치권의 외압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추진력 뛰어나고 용인술에도 정통
그러나 그에게는 어쨌든 ‘MB 맨’이라는 정치적 시각이 따라다닌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학 후배요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외국계 ING 생명 인수 등을 시도했으나 결국 좌초하고 말았다. 사외 이사들은 물론 회사 임직원들과의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임기를 채우고 2013년 7월 물러났지만 적지 않은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어윤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가 조직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쓸 줄 아는 용병술이 있으며, 성과를 이뤄나가는 추진력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그가 독선적이고, 성과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냉혹한 결과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학자 출신으로서 자리를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시각도 있다.
30년 넘게 어윤대를 지켜 본 나로서는 그가 여러 장단점이 있지만 조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CEO형 리더십의 소유자라는데 동의한다.
그에게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위해 설령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매진해나가는 열정이 있다. 아마도 그 열정이 그를 단순히 상아탑 내 학자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 현장에서 팔을 걷어붙여 일하게끔 만들었다고 본다.
과거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이런 열정의 소유자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원만하고, 관계와 절차를 중시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들이 각광받는다. 그런 시대가 됐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을 거쳐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를 지냈다. 저서로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