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이승만 정부): 1948년 제헌 헌법 기초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고문인 올리버 박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한국 사람들은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고 있소. 그러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선 권한 없는 총리가 있을 수 있소.” 이승만 정부 12년간 6명의 총리가 임명됐으나 철저히 총리의 탈정치화를 꾀했다. 초대 이범석 총리의 비서는 “총리의 역할이 특정 부처를 맡고 있는 장관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역대 정권별 총리는 어땠나
▶호남 배려(전두환 정부): 재임 7년간 7명의 총리가 거쳐갔다. 초기 두 명(남덕우·유창순)은 경제통이었고, 호남 인사도 3명(김상협·진의종·이한기) 임명했다. 유창순 총리는 장영자·이철희 어음부도 사건, 김상협 총리는 KAL기 피격, 노신영 총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총리 해임을 경제·사회적 사건과 연결시켜 도의적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학자(노태우 정부): 서울대 총장 출신인 이현재 총리부터 강영훈-노신영-정원식-현승종 총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육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었다. 군정 연장이라는 비난을 의식한 듯, 정치색이 옅은 학자를 중용했다는 평가다. 총리의 위상 강화를 위해 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주 1회 총리와 직접 대면해 국정을 논하기도 했다.
▶단명(김영삼 정부): 국면 전환용 총리 경질이 많았다. 재임 5년간 6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초대 황인성 총리는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된 후 농민의 강력한 반발 등을 고려해 사임했다. 대법관 출신 이회창씨는 두 번째 총리로 기용됐으나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내용이 총리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4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후임 이영덕 총리 역시 성수대교 붕괴 등을 이유로 8개월 만에 떠나야 했다.
▶공동정부(김대중 정부): DJP 연합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의 초대 총리는 당연히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였다. 한나라당의 반발로 5개월간 ‘서리’ 꼬리표를 달았으나 1년10개월 임기 동안 국가정보원장이 한 달에 2회 총리실을 방문해 보고할 정도로 막강했다. 박태준 총리에 이어 세 번째 총리 역시 이한동 당시 자민련 총재 권한대행이었다. 2000년부터 총리 인사청문회가 시작됐다.
▶분권(노무현 정부): 노무현 정부 4명의 총리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이해찬 총리였다. “야구팀으로 말하면 대통령은 구단주이고 총리는 감독”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과거 청와대가 관장하던 정책 홍보 및 정책현안 조정 등을 총리실이 맡아 진행했다. 하지만 언론과 야당에 대한 공격,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의 고압적 태도 등으로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테마형(이명박 정부):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던 2008년 초 “총리는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독자적인 업무를 갖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에 따라 초대 한승수 총리는 ‘자원외교’, 두 번째 정운찬 총리는 ‘세종시 수정안’의 해결사로 나섰으나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세 번째로 기용된 김황식 총리는 2년5개월을 재임해 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가 됐다.
최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