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변했다, 거절당해도 또 들이대

중앙일보

입력 2015.02.01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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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과 북한 고위 관리들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나타났을 때 북한 전문가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 북한은 그렇게 갑자기 고위 관리들을 나라 밖으로 파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는 예외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몇 주간 북한의 예외적인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황병서 방문만큼 스펙터클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시그널이 될 수 있다.

우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간의 대남 접촉이 실패했는데도 거듭 남측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이다. 황병서 등의 남한 방문은 결국 아무 결실을 맺지 못했다. 탈북자단체가 풍선을 날린다는 이유로 총격전도 벌였다. 보통 이런 일들이 있고 나면 북한은 한국이 먼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거나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대화를 제안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남측에 사실상 거절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대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그것도 최고위급 명의로.

둘째로 놀라운 점은 올 5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북한 지도자가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라는 러시아 측의 발표다. 북한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아니라 김 제1위원장이 직접 갈 것이라고 확인한다면, 이번 방문은 김정은의 첫 해외 방문이다. 첫 해외 방문지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란 점에서 북한의 중요한 노선 변화가 감지된다. 이는 중국과의 냉랭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평양이 아닌 서울만 방문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로 놀라운 점은 미국을 향한 북한의 조심스러운 유화책이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이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들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 실망을 넘어 클래퍼 국장의 외교관 신분을 박탈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다 몇 주 후 미국이 한국과 연합 군사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북한도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미 측에 제안했다. 물론 미국은 거절했다.


이렇게 미국에 거절당해 놓고도 북한은 지난달 9일과 13일 연이어 제안을 거듭했고 각국 언론에 설명까지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이 소니 해킹사건으로 북한과 미국이 싸우고 있던 동안에도 계속됐다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새해를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로 시작했다. 북한은 이에 항의하면서도 보복조치를 내놓지 않고 어떻게 하면 미국과 교류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경제 제재는 아니지만 북한에 엄청난 고통을 주는 금융거래TF(FATF)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범정부기구인 FATF는 현재 세계 각국의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북한·이란과 금융거래를 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실 북한과 경제 교류를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 제재보다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6월 북한은 FATF에 이런 조치를 없애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지난달 15일 FATF에 ‘자금세탁과 테러 지원을 금지하는 국제규범을 준수하겠다’는 서한을 보냈고 이튿날 이를 조선중앙통신에 공개했다. 매우 이례적이다.

나의 추정으로는 북한은 중국·구소련 같은 보호자를 잃은 것에 대한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러 본래 그들이 다른 나라 또는 국제기구에 유화책을 보낼 때 지키던 암묵적인 그들만의 룰을 스스로 깨버리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거절당해도 또 시도하고, 민감한 협상 내용을 공개하는 등 그들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 보고자 전전긍긍하고 있다. 북한은 이제 미국과 한국을 제외하고는 돈이 나올 곳이 없다. 중국과 관계가 나빠지면서 유사시 중국이 북한을 방어해 줄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북한이 두 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또다시 일거에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2일 정상회담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언급한 것에 대한 북한의 반응도 기대된다. 북한 관리들은 내게 박 대통령이 더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박 대통령이 러시아의 초청을 수락한다면 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한국 대통령을 평양이 아닌 곳에서 만나게 된다. 남북 관계에 너무나 많은 흥분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존 에버라드 전 영국 외교관. 벨라루스ㆍ우루과이 대사 거쳐 2006~2008년 주북한 영국 대사 역임. 전 스탠퍼드대 쇼렌스타인 아태연구센터 팬택 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