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와 사람] “100근이라도 사양 않을 텐데” 차 욕심 못 감춘 다산

중앙일보

입력 2015.01.18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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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의가 그린 다산도(개인 소장).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차의 실용을 제안해 국익과 민생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다인(茶人)이다. 그의 충직함과 박학다식한 면모를 아꼈던 정조(正祖)가 있었기에 그의 환로(宦路)는 탄탄대로를 달릴 듯했다. 하지만 사람의 행로(行路)를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다산을 총애한 정조가 승하한 후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은 그의 삶을 곤궁한 처지로 내몰았다. 하루아침에 총신(寵臣)에서 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신유년(辛酉年)에 일어난 정쟁(政爭)은 천주교도와 남인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정권을 장악한 벽파(僻派)가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탄압이었던 셈이다. 이벽(1754~85)과 이승훈(1756~1801)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했던 다산은 이로 인해 정치적인 피해를 봤다.

실로 탕평(蕩平)은 태평성대를 이룩하고자 했던 정조의 정치적 이상이었던가. 현실적으론 정치적 이념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대통합을 이룬 화합의 시절이란 그럴만한 시절 인연들이 모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탕평의 은택(恩澤)이 고루 세상에 퍼지기를 소망했던 올곧은 신하 다산이 유배지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것은 아마도 시대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19> 다산 정약용

3 강진 다산초당 전경.
2 마현 다산의 묘소.
결과적으로 다산은 현실을 극복한 현자(賢者)다.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는 강학과 저술로 드러났다. 벽지의 유생(儒生)과 한미한 중인(中人) 자제들을 몽학(蒙學)했던 성의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가 18년이나 머물던 다산초당은 그의 학문이 완성된 요람이며 강학처(講學處)였다. 그뿐만 아니라 다산초당은 차의 진미를 만끽하며 산정일장(山靜日長)의 여가를 즐기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유배 초기 사의재에서 머물던 시절엔 그를 후원했던 만덕사 승려 아암혜장(1772~1811)에게 얻은 차로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늘 소화 장애를 겪던 그의 위장을 시원하게 씻어준 차는 그의 병을 다스리는 약이었다.

이처럼 체화(體化)된 그의 차 생활은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의 집안 내력을 미루어볼 때 어린 시절부터 차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차를 즐긴 정황을 그린 시는 그의 나이 16세 때다.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가 지은 ‘등성주암(登聖住菴)’에서 “차로는 해갈이 되지 않아/ 거듭 맑은 돌 샘물을 마시네(茶湯未解渴/ 重試石泉寒)”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19세 때 예천 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가 예천 정당(政堂)의 동쪽에 위치한 반학정(伴鶴亭)에서 지은 ‘하일지정절구(夏日池亭絶句)’에서는 “어린 기생 차를 전해 주려고 사립문에 이르렀네(小妓傳茶到竹扉)”라고 했다.

그는 찻물의 품평에도 높은 안목을 드러냈다. 이는 ‘미천가(尾泉歌)’에서 확인된다. 이 시는 그의 중부(仲父) 정재운(丁載運)이 미천(尾泉)으로 이사했기에 이곳을 오가며 과시(科詩·과거 볼 때 쓰는 시)를 준비할 때 지었다. 그가 맑은 샘물을 길어다가 “용단차를 달여 묵은 병을 치료했다”고 했고 “육우가 온다면 어디에서 찻물을 찾을까/ 원교의 동쪽이요 학령의 남쪽이라(陸羽若來何處尋/員嶠之東鶴嶺南)”고 한 사실에서도 그의 물에 대한 감식안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 찻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샘물을 찾은 것은 당나라 육우다. 그는 천하를 주유하며 천하 명천을 지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의 십이명천(十二名泉)이다. 그중 제일 명천으로는 혜산천(惠山泉)을 쳤다. 이후 혜산천은 명천(名泉)을 상징한다. 다산이 육우를 거론한 연유는 여기에 있다. 육우가 만약 미천의 샘물을 감별한다면 틀림없이 최고의 물이라 인정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산이 차의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한 것은 강진 시절 아암과의 교유를 통해서다. 그가 사의재 시절 아암혜장에게 보낸 ‘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은 그에게 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해 듣기에 석름봉 아래에(傳聞石廩底)
예로부터 좋은 차가 난다던데(由來産佳茗)
때는 보리 말릴 시절이라(時當晒麥天)
삐죽이 차싹이 돋았겠지(旗展亦槍挺)
곤궁하게 살면서 굶는 것이 습관이라(窮居習長齋)
누린내 나는 것 이미 싫어졌다네(羶臊志已冷)
돼지고기와 닭죽은(花猪與粥鷄)
너무 호화스러워 함께 먹기 어렵고(豪侈邈難竝)
다만 근육이 당기는 병 때문에(秪因痃癖苦)
때론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한다네(時中酒未醒)
기공에게 차를 빌려(庶藉己公林)
육우의 솥에 달인다면(少充陸羽鼎)
(그대의) 보시로 병이 나을 것이니(檀施苟去疾)
물에 빠진 자를 건져줌과 무엇이 다르랴(奚殊津筏拯)
차 만들기 법도대로 해야만(焙晒須如法)
달인 차색이 투명하고 맑다네(浸漬色方瀅)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5

이 시는 1805년께 지었다. 그의 “보리 말릴 시절”에 “삐죽이 차싹이 돋았겠지”라는 말은 차 따는 시기를 표현한 것으로 대략 양력 5월 초순께를 말한다. 초의(草衣·1786~1866)도 채다 시기를 “입하 전후가 알맞다”고 했으니 당시의 채다 시기는 곡우보다 늦은 입하 전후였던 듯하다. 특히 그가 당나라 승려로 차에 능했던 “제기(齊己)에게 차를 빌려다가 육우의 솥에 달이면”이라 한 것은 바로 아암에게 차를 걸명(乞茗)하려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병고에 시달리던 그에게 차를 보시하는 일이란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것과 같다 한 것에서도 그에게 얼마나 차가 긴요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궁벽했던 그의 생활은 “장재(長齋)”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원래 장재는 승려들이 오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수행 전통을 의미한다. 그도 수행승처럼 굶기를 다반사로 한다는 말이니 곤궁한 처지를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검박(儉朴)한 선비도 차를 얻는 일은 예외로 욕심이 컸던 듯하다. 늘 아암에게 “100근이라도 사양하지 않을 텐데/ 두 꾸러미 다 베풀면 어째서”라든가 “나의 이웃들에게 곽란과 이질이 많은데/ 빌리러 오면 무엇으로 구제할까”라고 한 말은 그의 차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다산에게 차를 공급해 주었던 인물은 아암 이외에도 그의 제자 수룡색성(袖龍賾性·1777~?)이었다. 다산의 ‘사색성기차(謝賾性寄茶)’는 색성을 위해 지은 시로 내용은 이렇다.

장공의 많은 제자 중에(藏公衆弟子)
색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네(賾也最稱奇)
화엄 교리를 이미 터득하였고(已了華嚴敎)
두보의 시까지 배웠네(兼治杜甫詩)
좋은 차도 꽤나 잘 만들어서(草魁頗善焙)
살뜰하게 외로운 나그네 위로해주었네(珍重慰孤羇)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5

이 시도 아암에게 걸명시를 지었던 1805년께 지었다. 이를 통해 다산의 차 양식은 만덕사 승려들이 주로 제공했음을 드러낸다. 차를 잘 만들었던 수룡색성은 다산을 살뜰히 챙겨주었던 제자였다. 따라서 다산의 사의재 시절은 아암에 의해 심신의 여유를 어느 정도 회복했던 때였다. 그가 보낸 차는 다산의 심신을 위로해 주었다. 다산은 이들에게 경학이나 주역, 시문, 학문하는 태도 등을 가르쳤으니 전등계(傳燈契·불가의 제자)의 끈끈한 인연은 차와 학문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4 다산 초상(김호석 작, 강진군청 소장).
다산과 승려들의 이런 인연 때문인지 혹자는 다산이 승려들에게 차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를 만드는 일은 불가의 독특한 문화였고 사의재 시절 차를 공급해준 것은 만덕사의 아암 문도들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신빙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는 다산이 차의 자급자족을 꾀한 것은 아암이 열반한 후인 1811년 이후라 짐작된다. 이는 그가 해배(解配)된 후 강진을 떠나며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서 “곡우엔 어린 찻잎을 따서 1근을 만들고 입하에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이 엽차 1근과 떡차 2근과 시와 편지를 같이 부친다”는 약조를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그가 수만 종의 도서를 열람했고 차의 이론에도 밝았기에 승려들에게 차의 새로운 이론을 알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가 승려들에게 제다법을 가르쳤다는 설은 와전(訛傳)된 것이라 생각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산은 강진에 널려 있는 차를 이용해 국익과 민생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가 제시한 차의 활용론은 『상두지(桑土誌)』와 ‘동관공조, 임형시(冬官工曹 林衡時)’ ‘각다고(榷茶考)’ 등에 나타난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차의 실용화를 주장한 인물은 이덕리(李德履·1728~?)다. 그는 유배지 진도에서 ‘기다(記茶)’를 저술, 차의 활용 방안을 제시했으니 이는 농업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화되는 시기에 대두된 차의 실용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강학과 저술의 결과는 500여 권의 서적을 남겼고 강진 지역 유생(儒生)들뿐 아니라 대흥사와 만덕사의 승려들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다산학단(茶山學團)의 형성은 그의 시대적 소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적거지의 어려움을 극복한 위대한 스승, 다산이 오래도록 후인들에게 추앙을 받는 연유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의 자는 미용(美庸), 귀농(歸農)이고 호는 다산(茶山), 탁옹(籜翁),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을 사용했다. 저술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 권을 남겼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성균관대 겸임교수.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사송』 『추사와 초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