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박물관을 돌아본 소중 학생기자단이 바로 옆 과지초당을 찾았다. 과지초당은 김정희가 말년에 머물렀던 곳이다.
영어 표현 중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이라는 말이 있다. 문학·회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이다. 르네상스 시기 회화·음악·화학·천문학·건축학·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르네상스 맨의 좋은 예시다.
조선시대에도 다방면에서 보인 재능을 통해 후대까지 이름이 전하는 천재가 있다. 바로 조선 후기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다.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에 있는 추사박물관에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김정희의 생애와 업적을 알아보기 위해 추사박물관을 찾았다.
김정희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1786년(정조 10년) 태어났다. 이후 아들이 없었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출계했다. 아버지(생부)인 김노경은 예조·병조판서 등 요직에 등용됐고, 글씨를 잘 썼다. 아들인 김정희도 어릴 때부터 글씨·그림을 잘하는 것을 기본 덕목으로 삼아 열심히 연습했다.
윤재하 학예사(맨 오른쪽)가 소중 학생기자단에 김정희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김정희는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하는 고증학과 그 한 줄기로 나온 학문으로 실제 돌이나 쇠붙이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를 연구하는 금석학에 능통했다. 그가 고증학·금석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809년 청나라 연경(지금의 중국 북경) 방문이다. 실학자 박제가의 제자였던 김정희는 스승의 영향으로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배우고 싶어했다. 마침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가게 돼 자제군관(연수생)의 자격으로 함께 갔다.
김정희는 연경에서 40여 일 머물며 새로운 문물을 살피고, 여러 학자를 만났다. 특히 청대 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를 만나 직접 고증학을 배웠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한 수 아래 나라로 여겼기에 조선사람 김정희가 대학자 옹방강의 제자가 됐다는 소식은 연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당시 김정희가 옹방강과 나눈 필담서를 추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발견기 탁본. 김정희는 금석학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 발견도 했다. ⓒ추사박물관
1819년 과거시험에 급제한 김정희는 요직을 맡으며 출셋길에 오른다. 하지만 1840년 정쟁에 휘말리면서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성에 위리안치됐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형벌이다.
김정희가 남긴 서화의 대표작인 ‘세한도’가 탄생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벼슬길에 올라 탄탄대로를 걷던 김정희는 가시울타리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며 찾아오는 이도 없는 생활에서 많은 외로움을 느꼈다. 이때 역관이었던 그의 제자 이상적이 청나라에 갔을 때 김정희가 보고 싶어했던 여러 서적을 구해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와서 가져다줬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려줬다.
‘세한’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이다. 이 그림을 국보이자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뽑는 이유는 첫째로 작품의 제목, 작가의 이름,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 김정희는 외로움, 한양보다 불편한 생활, 여러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힘든 유배생활을 하며 제자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상황이었다. ‘세한도’는 메마른 붓질로 (당시 김정희의 상태를 반영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논어』의 나오는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문인화라는 점에서 명작이라 할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인 ‘세한’을 인용한 ‘세한도’를 보면 유배생활 중이던 김정희의 심경이 잘 드러난다. ⓒ추사박물관
문인화는 고고한 선비 정신과 곧은 절개 표현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담아 표현했다. 그래서 문인화를 감상하려면 그림에 표현된 대상의 형태보다는 거기에 숨어있는 그린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정희가 과천에 머물면서 그렸다고 전해지는 ‘불이선란도’는 실제 난초를 그린 것이 아니지만, 그가 오랜 수련을 통해 구현한 문인화의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보물로 지정됐다.
김정희 하면 바로 떠오르는 키워드 중 하나는 그가 완성한 글씨체인 추사체다. 김정희의 글씨체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여러 번 변화했는데, 제주 유배생활을 기점으로 독창적이며 뛰어난 구성미를 갖춘 글씨체로 진화한다. 추사박물관 전시실에는 ‘촌노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김정희의 서예 작품이 전시돼 있다.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채소이며,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손자라’라는 뜻으로 김정희가 말년에 4년간 과천에 머무르면서 깨달은 인생의 진리를 쓴 것이다. 굳세고 힘찬 붓놀림으로 써 내려 간, 굵기 차이가 심한 각진 글씨체가 추사체의 정수를 보여준다.
김정희가 창안한 추사체는 그가 열 개의 벼루와 천 개의 붓을 닳게 했다고 말했을 만큼 큰 노력 끝에 탄생했다.
이렇듯 금석학·문인화·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던 김정희의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 아닌, 노력에 의한 결과물에 가깝다. 김정희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70여 년 동안 살면서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을 만큼 연습했다. 이를 통해 김정희가 금석학·문인화·서예 등 여러 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조선의 문인화·서예 등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현재에도 김정희의 작품을 이용한 여러 디자인이 개발되고 있다. 또한 유배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닦아 여러 업적을 남긴 김정희의 일생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추사박물관
주소: 경기도 과천시 관문로 69(중앙동)
관람시간: 9시~18시 (매표는 17시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관람료: 어른 2000원, 중·고생 및 군인 1000원, 초등학생 500원, 6세 이하 및 노인 무료
문의: 02-2150-3650
관람시간: 9시~18시 (매표는 17시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관람료: 어른 2000원, 중·고생 및 군인 1000원, 초등학생 500원, 6세 이하 및 노인 무료
문의: 02-2150-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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