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임기 중 처음으로 미국 의회 연설에 나섰다. 일본 총리의 국빈 방문과 의회 연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이후 9년 만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기시다 총리는 연설에서 일본이 “미국의 글로벌 파트너”라며 ‘벚꽃 동맹’을 강조했다. “중국의 군사 동향이 국제사회의 전체 평화와 안정에 있어서 지금까지 없던 최대의 도전을 불러오고 있다”면서다.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도발,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러시아에 맞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의 일본의 역할과 지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
기시다 총리가 이번 국빈방문을 통해 무기 공동개발,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연계 강화 등 사실상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서의 지위를 미국으로부터 확인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기시다 총리는 그럼에도 정작 과거 제국주의 야욕과 침략, 식민지 지배와 같은 역사 문제에 대한 성찰은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 의회 연설보다 후퇴
기시다 총리는 일본의 방위비 인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오는 2027년까지 일본 GDP(국내총생산)의 2%에 달하는 재원을 방위비 예산으로 확보해 필요한 경우 적의 기지를 공격하는 ‘반격능력’에 쓸 수 있도록 한 자신의 성과를 미국 의회에 강조한 셈이다. 아베 전 총리조차 이루지 못했던 사실상 전쟁이 가능한 반격 능력을 명기한 국가 안보문서의 개정과 방위비 인상이 이뤄지고 있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그러면서도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하는 주변국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과거사는 아예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역사수정주의적 시각을 고수해온 아베 전 총리조차도 2015년 연설에서 침략, 식민지배, 사죄 등의 표현은 쓰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시인했는데, 이보다도 훨씬 후퇴한 것이다. 당시 그는 과거사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겠다고도 밝혔다.
기시다 총리의 역사 회피와 한일관계
포스코 등 국내 민간 기업의 기여로 일제강제동원피해지지원재단을 통해 배상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일본 기업의 기여는 지금껏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강제징용 해법 발표 후 일본 측에 ‘성의있는 호응’을 요구했던 윤석열 정부로서도 총선 참패 직후에 이뤄진 기시다 총리의 이같은 의회 연설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시다 연설 15차례 기립박수, 온도차도
기시다 총리 뒤편에 있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포함해 의원 대부분은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인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 의장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 측근으로 꼽히는 마조리 테일러 그린 하원 의원 등 공화당 의원들도 일어나지 않았다.
◇외교부 "기시다, 미·일 관계 중점 둔 것"=외교부 당국자는 12일 전날 기시다 총리의 미국 의회 연설에서 과거사 언급이 없었던 것과 관련해 "이번 기시다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은 미·일 관계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는 한 줄짜리 짤막한 입장만 밝혔다. 과거사 인식에 있어선 9년 전 아베 전 총리 연설보다도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이에 대한 외교부 차원의 유감 표명이나 별도 언급은 전혀 없었다.
윤석열 정부는 최악으로 치닫던 한·일 관계를 전격적으로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와 동시에 일본과의 관계 관리에 무게를 둔 나머지 과거사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데는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