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도시가 좋은 도시라고 하는데, 요즘 서울은 꽤 괜찮은 도시가 된 것 같습니다. 골목골목 만날 수 있는 도시 콘텐트가 풍성해졌다는 점에서요. 예전에는 강남역이나 광화문, 명동 같은 중심가 위주로 관광·상업·문화 자원이 몰렸다면, 최근 들어 점차 다양한 지역으로 문화의 온기가 스며들고 있어요. 기존 도심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 거닐만한 거리가 많이 생겨나고 있죠.
생동하는 현재형 유산들
면면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박제된 문화재와 달리 지금도 생동하는 현재형 유산들이라고 할까요. 수십 년간 한자리를 지켜와 지금도 줄을 서는 맛집부터, 남다른 사연의 건물, 북적이는 전통 시장, 독특한 개성을 품은 골목까지. 모두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반영하는 유산들이죠.
오늘은 우리가 즐길만한 도시 콘텐트라는 측면에서 서울미래유산을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비크닉이 지난달 ‘동행매력 서울투어’에 다녀왔습니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서울미래유산을 둘러보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입니다. 발길 닫는 곳마다 재미난 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경복궁의 서쪽, 서촌을 둘러봤습니다.
경복궁 서쪽, 골목마다 스며든 이야기
예술가의 흔적이 담긴 공간으로 타임슬립
서촌만의 예술적인 분위기는 과거 이곳을 거쳐 간 예술가들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화가 이중섭, 작가 이상을 비롯해 지금도 통인시장 안에는 시인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이 남아있어요. 윤동주 시인은 “내가 이 집에 살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인근 통인시장은 이곳의 명물인 ‘기름 떡볶이’와 ‘엽전 도시락’으로 유명하죠. 현금을 엽전으로 바꿔주는데 도시락통을 들고 각 가게에 가 엽전으로 음식을 구매할 수 있어요. 시장 내 가게들을 돌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도시락에 담을 수 있는 ‘시장통 뷔페’인 셈이죠.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즐기는 전통시장의 매력이 충만한 통인시장은 2015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어요.
400곳의 추억, 100개의 기억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미래유산은 ‘지정문화재 또는 등록문화재가 아닌 유·무형의 것 가운데 서울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기억과 감성을 지닌 근·현대 서울의 유산’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선정을 시작해, 올해로 500개를 넘어섰습니다. 400여 군데의 장소와 100여 개의 무형 유산이 지정됐죠.
지난 10년간 서울 미래유산은 발굴에 초점을 맞춰 진행해왔지만, 앞으로는 이를 잘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난 2018년부터 경영난을 겪는 민간 소유 미래유산에 소규모 수리 및 환경개선 비용을 직접 지원하는 이유죠. 미래 유산에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팸플릿이나 엽서 등을 제작해 홍보에 나서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가 아닌 사유재산이므로 소유자의 자발적 보존 노력도 필요합니다.
루이비통이 반한 잠수교도 서울미래유산
이에 그치지 않고 잠수교는 서울시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에 따라 2026년 한강 최초의 보행교로 바뀔 예정입니다. 현재 차량 통행이 이뤄지는 부분이 전면 도보로 개방되는 거죠. 산책로와 소규모 공연장 등의 기능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실제로 이미 잠수교에서는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이뤄지고 있고, 지난 4월에는 국내 최초로 열린 루이비통 프리폴 패션쇼가 열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과거의 유산이 진정한 ‘미래’ 유산으로 거듭난 대표적 사례죠.
도시 곳곳에 숨은 붉은색 인장을 찾아서
그런 만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즐기고 향유할 때 더 잘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거쳐 더 증폭된 기억과 감성으로 미래까지 전달되었을 때 더 의미 있기 때문이죠.
걷기 좋은 계절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의 동네를 탐방해보는 건 어떨까요. 붉은색 인장 ‘서울미래유산’의 가이드를 따라서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길거리와 골목길, 오래된 가게와 빌딩에서 몰랐던 이야기들 혹은 위대한 유산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