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도착한 플로리악은 사실상 NYT의 종군 기자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 말 그가 기자로서 밝혀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사건이 터졌다. 수도 키이우 북서쪽의 소도시 부차 등지에서 450여구의 민간인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저지른 만행"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부차 대학살'이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며 반발했다.
진실을 찾기 위해 플로리악은 자료 수집부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휴대전화 녹화 영상을 하나하나 받아냈다. CCTV 자료도 입수했지만 23테라바이트(TB) 분량(영화 570편 규모)의 영상을 분석하는 동안 전기는 수시로 끊겼다. 그렇게 러시아군의 차량·무기·제복 등을 파악해 학살의 증거들을 수집했다. 유가족의 협조를 구해 사망자의 휴대전화 기록을 얻었고, 러시아군이 피해자의 전화기를 빼앗아 본국 가족에게 전화를 건 사실도 확인했다.
8개월에 걸친 추적 보도 끝에 플로리악은 러시아군 234연대가 학살의 주범이란 걸 밝혀냈다. 그는 올해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상을 받았다. 러시아의 부인에도 ‘부차 학살’은 이 전쟁의 의혹이 아닌 사실이 됐다.
'살해하겠다' 익명의 메시지로 위협
이 때문에 콘퍼런스가 열린 스벤스카 매산(Svenska Massan) 컨벤션센터엔 허벅지에 총을 찬 경찰이 건물 안팎을 드나들었다. 긴급 상황을 대비한 듯 경찰차도 문 앞에 서 있었다. 건물 밖을 나갔다 들어올 때면 필수적으로 가방 검사도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참가자들의 입장 시간이 늦어져 오전 강연 일부가 예정 시간보다 늦게 열리기도 했다. 주최측은 참가자들에게 “행사장 주변에서 출입증 목걸이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말을 걸면 신고해달라”는 휴대전화 메시지도 보냈다.
한 강연에서 우크라이나 기자를 향한 방청객 질문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함을 느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걱정 담긴 질문이었지만 자유유럽라디오방송의 발레리아 레고시나 기자는 유쾌하게 답했다.
“제가 사는 동네보다는 여기가 안전하죠. 오늘도 키이우에 폭격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곳 예테보리엔 폭탄이 떨어지진 않았잖아요.”
레고시나는 ‘전쟁 참상을 취재한 데 따른 정신적 충격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술을 한잔 마시면 모든 게 다 해소된다”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는 지난 1년 반 동안 러시아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분 덕에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멈추지 않고 취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연장에 박수가 터졌다.
행사장에서 우크라이나 기자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현했다. 70년 전 전쟁을 겪은 나라의 여론이 궁금해서다. ‘Republic of Korea’가 새겨진 출입증을 목에 걸고 행사장 이곳저곳을 다니는 기자에게 우크라이나 언론인들은 수시로 말을 걸었다.
“우리가 어떤 뉴스를 쓰면 한국 독자나 정부가 관심을 가질까요?”(줄리아 히메릭)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크라이나에 있는 고려인의 동향이나 한국전쟁과의 비교를 해본다면 관심도가 좀 올라가지 않을까요.”(기자)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 대한 반대 여론도 있습니까?”(예베니아 드로즈도바)
“침공 초기 반미 성향을 가진 가진 측에서 그런 주장을 한 적은 있었어요. 그런데 이후 그 참혹성이 너무 심해서 그런 말을 더 이상 꺼내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기자)
"한국이 대만보다 전쟁 위험 더 커"
강연 뒤 기자는 리치테에게 "대만 사람들이 느끼는 중국의 위협 수준이 크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리치테는 "한국 사람들이 북한 미사일 위협에 무덤덤한 것처럼, 대만 사람들도 매일 아침 굉음을 내고 돌아가는 중국 전투기에 대해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며 “하지만 분명한 위기 상황인 건 맞다. 특히 서울이 군사분계선에서 70㎞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한국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콘퍼런스에 모인 기자들은 뉴스로 전쟁을 막거나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감춰진 사실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멈춰선 안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플로리악도 이렇게 말했다.
“전쟁 보도가 영향력을 발휘해 미래에 벌어질 전쟁을 막고, 전쟁범죄가 예방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같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살해도 멈추지 않고 있어요. 안타깝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기록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현장 취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탐사보도 과정’으로 진행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