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지역 사례를 연구한 변윤희의 2018년 논문에 따르면 영아사망이 흔했던 시기 어린아이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출산 직후 여자아이임을 확인하면 의도적으로 방치해 죽이는 관행도 있었다. 장례나 작별인사 같은 의례도 없었다. 아이가 죽으면 집안의 남성이 시신을 낡은 옷이나 천으로 둘둘 싸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산에 묻었다. 애장터·애촉·애처구덩이·아장단지·애기장 등 이름은 지역별로 달랐지만, 1970년대까지는 마을마다 죽은 아이를 묻는 암묵적인 장소가 있었다. 무덤을 꾸준히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 시대 아이의 죽음은 별것 아닌 일이어야 했다. 살아있는 아이들과 목구멍에 풀칠하는 게 우선이었다.
소설가 구효서의 단편 ‘명두’에서도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주인공은 제 아이를 셋이나 죽여 굴참나무 밑에 묻었다. 굴참나무는 원래 깊은 산중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먹고살 만한 세월이 되어 산 중턱까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뿌리째 뽑힐 처지가 된다. 한때는 생존 방식이었던 영아살해 역시 숨길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범죄가 되어 맨몸을 드러낸다.
2022년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2.3명이다. 첨단 의학 시대에 ‘그림자 아이’가 2000여 명에 달한다. 전수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연일 사망 소식이 이어진다. 냉동실에 영아 시신을 넣어둔 채 살아있는 아이들을 키운 엄마는 남편은 출산한 것도 몰랐다며 홀로 죄를 뒤집어쓴다. 아이를 죽인 엄마들만 엄벌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오죽하면 냉장고가 애장터가 되도록 우리 사회가 방치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