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반대" 폴란드 50만명 반정부 시위…민주화 이후 최대 규모

중앙일보

입력 2023.06.05 15:07

수정 2023.06.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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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폴란드에서 4일(현지시간) 반정부 시위가 열려 수도 바르샤바에 약 50만 명이 집결했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정책과 높은 물가 등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온 것으로, 1989년 폴란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한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고 로이터통신 등은 전했다.  

지난 4일(현지시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AFP=연합뉴스

이날 시위는 중도 성향의 제1야당 시민강령당(PO)을 이끄는 도날트 투스크(66) 전 총리가 야권을 규합해 주도했다. 시위대는 1989년 6월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게 치러진 선거를 기념하기 위해 결집했지만,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PiS)의 극우·포퓰리즘 정책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고공행진 중인 물가를 꼬집는 구호, 오는 10월 열릴 총선에서 공정한 선거가 치러져야 한단 요구 등도 이어졌다.  
 
폴란드 노동·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레흐 바웬사(80) 전 대통령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오랫동안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던 바웬사는 이날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며 "법과 정의당과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대표가 쫓겨날 날을 기다려 왔다"며 "그 날이 마침내 왔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시민들은 폴란드 국기와 유럽연합기를 들고 나왔으며 시위는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다"면서도 "대통령궁을 향해 '투옥하라'는 등 분노에 찬 구호도 들렸다"고 보도했다. 이날 시위는 바르샤바뿐 아니라 폴란드의 다른 도시들과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에서도 소규모로 열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이날 시위를 이끈 야권 지도자 도날드 투스크(오른쪽) 전 폴란드 총리와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 AP=연합뉴스

이번 시위에 많은 시민이 모인 데는 최근 법과 정의당이 내놓은 '러시아 영향 공직자 퇴출' 법안 탓이 컸다. 2007년 이후 러시아가 폴란드에 끼친 영향을 조사하겠다며,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 공직자에 대해 최대 10년간 공적자금·보안 인가 관련 공직 진출을 막는 것이 이 법안의 골자다.  
 
그러자 10월 총선에서 정권 교체를 노리는 투스크 전 총리(2007~2014년 재임)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을 겨냥한 법안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폴란드 정부가 러시아를 핑계 삼아 '정치적 마녀사냥'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를 내놨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법안을 수정하겠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시민들의 결집을 막진 못했다. FT와 인터뷰한 한 시민은 "러시아를 규탄하는 정부가 폴란드를 러시아 같은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꼬집었다.  


우경화하는 폴란드, EU와도 사사건건 갈등

폴란드는 2015년 총선에서 극우·민족주의 정당인 법과 정의당이 포퓰리즘적 정책을 내세워 집권한 이후 갈수록 우경화해 왔다. 두다 대통령이 2020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면서는 동성 커플이 아이를 입양할 경우 처벌하는 등 성소수자의 권리를 여러모로 제한한 데 이어, 낙태금지 요건도 더욱 강화했다.  

지난 4일(현지시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 시민들은 폴란드 국기와 유럽연합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AP=연합뉴스

논란은 해가 갈수록 커졌다. 엄격해진 낙태법을 두고 유럽연합(EU)이 강도 높게 비판하자, 2021년 10월 폴란드 헌법재판소가 '폴란드 헌법이 EU 조약이나 법에 우선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국가들이 공유하는 'EU법 우선의 원칙'에 회원국이 반기를 든 첫 사례였다. 그러는 사이 폴란드 사회도 양분됐다. 극우 진영에선 '폴렉시트(폴란드의 EU 탈퇴)'를 해야 한단 주장까지 나왔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폴란드가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되며 EU 내 위상은 높아졌지만,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집권당이 전쟁 상황을 권력 강화에 이용하려 한단 비판마저 인다. 가디언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폴란드가 서방 동맹의 중요한 한 축으로 부상하며, 두다 정부는 당에 대한 비판을 묵살해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여론조사에 따르면 10월 총선에서 법과 정의당과 시민강령당 모두 단독정부를 구성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한편 이날 시위에 대해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정치권에 오래 있던 늙은 여우들이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고선 시민 시위라고 한다"며 "서커스 같다"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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