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2차대전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전승절의 하이라이트인 '불멸의 연대' 행사도 여러 지역에서 취소됐다. "테러 국가에 상대하고자 혹시 모를 공격에 대한 예방 조치"라는 게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의 설명이다. 대규모 거리 행진도 온라인과 지역별 소규모 행사로 대체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병력과 장비 피해가 심각한 러시아군은 올해 열병식에 동원되는 장병과 장비도 대폭 줄였다. 지난해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리는 본행사에만 1만1000여명의 군인이 투입됐다.
푸틴 대통령은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의 정상들과 함께 9일 오전 붉은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을 지켜봤다. 그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현재 조국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우리는 이에 맞서 주권을 수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간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으로 불러왔지만, 이번 기념식을 통해 처음으로 '전쟁'으로 규정한 것이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전승절만 해도 "특별군사작전이 서방 공세에 대한 선제 대응이었으며, 전적으로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이번 기념식에서 "러시아는 평화로운 미래를 원하지만, 서방 국가들이 되레 우리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키우고 있다"며 "그들(서방)의 목표는 러시아의 몰락"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2차대전에서 미국과 영국의 역할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서방은 누가 독일 나치를 물리쳤는지 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최소 15개 도시에선 드론 비행을 막기 위해 위성항법장치(GPS) 신호를 교란하는 전파방해 작업도 실시됐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 시민들은 도심에서 일시적인 차량 공유서비스 이용 장애 등의 불편을 겪었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행사용 군용기 비행을 아예 취소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군은 전승절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규모 자폭 드론 공격에 나섰다. 지난 8일 우크라이나군은 성명을 통해 "러시아군이 60여대의 이란제 자폭 드론으로 공습했다"며 "이 중 36대는 수도 키이우를 향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남부의 흑해 도시 오데사에서도 러시아군의 드론 공격으로 식량 창고가 불 타고 관계자 3명이 다쳤다.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에서도 격렬한 교전이 재개됐다. 바흐무트 교전을 주도하는 러시아 민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은 8일 "130m 진격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유럽 최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자포리자주(州)에서도 20여 곳 이상의 마을이 포격을 받아 주민 수백 명이 긴급 대피하는 등 긴장이 고조됐다. 현재 자포리자 원전 6기는 모두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한편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사거리 250㎞가 넘는 SCALP-EG '스톰 섀도(Storm Shadow)' 순항미사일을 지원할 것이란 외신 보도가 나왔다. 8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는 영국 국방부가 지난 2일 '우크라이나 지원 국제기금(International Fund for Ukraine)'에 관련 조달 공고를 내고 미사일 지원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당 기금은 영국이 주도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협력기금으로, 영국 국방부 측은 각국에 3일 이내에 미사일 지원에 대한 '관심'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현재까지 서방 각국은 확전 가능성을 이유로 우크라이나군에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은 제공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에이태큼스(ATACMS) 전술지대지 미사일 지원에 대해선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