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치킨게임, 한국기업의 길
이번 세미콘 코리아에는 반도체 기업 450곳이 참여했고, 6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지난 15년간 박람회에 참석했다는 한 반도체 장비업체 관계자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렇게 인파가 몰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반도체 시장이 어렵다는 대변을 하는 것 같다”며 “어려운 시기일수록 미래 모색에 더 적극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반도체 시장이 얼어붙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K반도체’가 주도하는 메모리 분야는 13년 만에 최악의 한파를 맞았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97% 감소했다. SK하이닉스도 10년 만에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1983년 2월 8일 이른바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지 4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달라진 치킨게임…감산 대신 AI 반도체로 반전 노린다
상황이 이런데도 삼성전자는 올해도 투자를 축소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 1일 임직원들에게 “왜 감산하지 않냐는 질문이 많지만 지금 우리가 손 놓고 다른 회사와 같이 가면 좁혀진 경쟁력 격차를 (다시) 벌릴 수 없다”며 “지금이 경쟁력 확보의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메모리 점유율 40%에 만족하면 안 된다. 예전 인텔 CPU(중앙처리장치)처럼 90% 점유율이 왜 안 되겠느냐”고 강조했다.
업체 추가 도산 땐 공급망에 악영향
업다운 사이클을 반복하는 메모리 시장의 특성상 과거 수차례 치킨게임이 펼쳐졌다. 1970년 D램을 처음 선보였던 인텔은 도시바·후지쓰·NEC 등 일본 기업의 공세에 밀려 86년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했다. 2007년에는 대만 D램 업체들이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리자 가격이 폭락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세계 2위 독일의 키몬다가 2009년 파산했다. 불과 1년 후 2010년 후반, 대만과 일본 기업이 다시 한번 맞붙으면서 3위였던 일본 엘피다가 미국 마이크론에 흡수되며 치킨게임은 마무리된다.
세계 1위 삼성이 공급량을 줄이지 않으면 메모리 가격 하락은 불가피하다. D램 범용제품인 DDR4(8GB)의 지난달 평균 고정거래 가격은 1.81달러였다. 2021년 7월 4.10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반 토막 이하다.
하락세가 계속된다면 수익성은 더 떨어지고 특히 자금 여력이 부족한 기업의 피해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다수의 전문가는 치킨게임이 시작됐다고 보기에는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진단했다. 요컨대 게임판은 훨씬 더 커졌는데, 플레이어 수는 줄어서다. 지금처럼 3~4개의 소수 업체만 남은 상황에서 한 곳이 무너지면 공급망에 악영향이 갈 수 있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일정 숫자 이상의 회사가 존재하지 않아서 치킨게임을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치킨게임으로 얻는 열매보다 리스크가 더 클 수 있다는 의미다.
올 하반기 메모리 수요 늘어날 가능성
여차하면 삼성으로선 기술적 감산에 나설 수도 있다. 웨이퍼 투입량을 줄이지 않는 대신 첨단 공정 도입, 생산라인 효율화 등을 통해 출하량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김선우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도 결국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해 2분기 말쯤이면 메모리 공급 기조가 180도 전환될 것”이라며 “업계에서는 이를 ‘삼성피벗(pivot·전환점)’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이어 “감산 정도가 아니고 투자까지도 깎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도 전망했다.
하반기 들어 메모리 수요가 늘어나면 분위기가 반전될 여력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엔 기회가 될 수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최근 DDR5를 지원하는 인텔의 차세대 서버용 CPU가 수요를 견인할 것”이라며 “챗GPT 등 인공지능(AI)에는 처리 데이터가 많아 앞으로 수요 증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