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가 다시 대한민국을 덮쳤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 이후 8년 여 만이다. 전국 병원과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5명의 빈소에서 만난 유족들의 감정은 슬픔과 원망, 상실감과 무기력, 그리고 자기비하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감정들을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징후들이라고 진단한다. 홍현주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트라우마는 교과서적으론 1년 정도면 가라앉는다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재난의 경우 트라우마를 입는 범위가 유족에 국한되지 않고 그 지속기간도 길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가족의 상실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평택제일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유가족은 “아들 (시신)을 확인했는데도 그냥 꿈인 거 같다”고 말한 뒤 이내 “아이를 집 근처로 옮겨야 하는데 어디에 말해야 하느냐”고 묻다가 갑자기 주저앉아 오열했다.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다른 유가족도 “너무 황당해 아직 믿기지 않는다”며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사고가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을 걱정한 세월호 참사 유족 27명은 이날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았다. 세월호 유족인 장훈 4·16안전사회연구소 소장은 “자식 잃은 슬픔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기 어렵고 트라우마는 유족뿐만 아니라 생존자와 목격자 등을 포함한 사회구성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이 입은 상처는 유족 못지않다.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강모(20대 초반)씨는 “그날 이후 잠을 못 자고 있다. 계속 불안하고 멍하다”며 “검사상으로는 별문제가 없다는데 몸 전체가 아파서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계속 불편하다”고 말했다. 한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동분서주하던 소방대원과 의료진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한다. 한 소방대원은 “이렇게 마음 불편한 경험은 처음”이라며 “현장에선 응급처치하느라 몰랐는데 피해자들이 비슷한 연배여서 그런지 지나고 난 뒤에 오히려 희생자들의 모습들이 선명히 떠오른다”고 말했다. 심정지 상태로 들어온 환자들을 살리려 애썼던 서울 시내 한 종합병원의 간호사는 “온몸에 멍이 든 채로 사망해 들어온 체구가 작은 여성에게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걸 보면서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내가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울었다. 사망환자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그날은 잠이 안 왔다”고 말했다.
참사 현장을 그대로 담은 무삭제 동영상이 인터넷 공간을 타고 급속히 퍼진 게 트라우마 확산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인기몰이를 노린 일부 BJ들의 현장 영상들도 논란 속에 삭제와 복제를 반복하며 퍼져나갔다. 서울에 사는 40대 박모씨는 “무삭제 영상을 본 뒤 며칠째 내가 그 골목길에 갇힌 장면이 꿈에 나온다”며 “주위에도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여럿”이라고 말했다. 트라우마 확산 속도가 예사롭지 않자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성명서 까지 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사고 당시의 참혹한 영상과 사진이 SNS 등을 통해 일부 여과 없이 공유되면서 고인과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해 2차, 3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고 다수 국민에게 심리적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