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는 이자람이지, 이 말 고맙고도 싫었죠" 그렇게 12년 흘렀다

중앙일보

입력 2022.10.13 17:25

수정 2022.10.1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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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서편제'에서 소리꾼 송화 역의 이자람이 열창하고 있다. 사진 페이지(PAGE)1

“뮤지컬 ‘서편제’ 출연은 산속에 조용히 살던 내가 가끔 현대문명 구경을 나오는 느낌이었어요.”
창작 뮤지컬 ‘서편제’의 12년 여정을 마무리 짓는 소리꾼 이자람(43)의 소감이다. 임권택 감독의 동명 영화로 유명한 이청준의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 '서편제'는 전통 판소리와 서양의 뮤지컬을 버무려 생명력이 길었다. 중요 무형 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적벽가) 이수자인 이자람이 눈먼 소리꾼 ‘송화’ 역을 맡아 2010년 초연부터, 오는 23일 막을 내리는 마지막 다섯 번째 시즌(8월 시작)까지 모두 무대를 지켰다. 뮤지컬 배우 차지연이 초연부터 송화 캐스팅을 함께 하면서다.  
 

"서편제는 이자람"이란 말, 시험에 들게 했죠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공연 직후 만난 이자람은 “판소리 작품이라고 다 하지는 않는데 ‘서편제’는 꼭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통음악과 밴드활동(※아마도 이자람 밴드. 이자람이 보컬‧기타를 맡고 있다)을 병행하며 현대적인 삶에서 자기 것을 추구하는 창작자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명분이 돼줘야 한다는 말에 강하게 설득됐다”고 돌이켰다. “계속 남의 동네에 와있는 기분이었는데 마지막 공연을 하게 되니까 비로소 나도 이 뮤지컬을 하는 사람 중 하나란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고 했다.  
올해 고별 무대까지 송화 역을 거친 배우는 10명. 하지만 "서편제’는 이자람”이란 평판이 굳어져 있다. 스무살에 ‘춘향가’ 8시간을 최연소 완창하는 등 판소리에 오롯이 바쳐 온 그의 실제 삶과 음색이 송화를 더욱 살아있는 인물로 빚어내서다.  
정작 그 자신은 “‘서편제는 이자람’이란 말이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배우들 각자가 자신들의 삶에 송화를 대입해 어디론가 데려가고, 노력할 텐데 그런 다른 점을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관객이 어여쁘게 해석해주면 고맙지만 나는 내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특별히 환상이 심어지거나 하고 싶지 않았죠. 그게 나를 늘 시험에 들게 했어요.”

소리꾼 이자람. 사진 페이지(PAGE)1

이자람은 처음엔 뮤지컬 관객들 귀에 자신의 소리가 낯설까 봐 무서웠다고 했다.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엔딩에서 송화가 동생 동호와 마주 앉아 부르는 ‘심청가’는 폭발적인 여운을 남기는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뮤지컬 '서편제' 주연 소리꾼 이자람
12년 전 초연부터 5시즌 모두 공연
이청준 원작 속 소리꾼 송화 재해석
"송화는 눈 안 멀어도 소리꾼 됐을 것"

"송화는 눈 안 멀어도 소리꾼 됐을 것"

판소리의 일인다(多)역에 익숙해서일까. 송화의 일생을 그리는 뮤지컬에서 그는 매 장면 군더더기 없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초로의 눈먼 송화로 처음 무대에 등장해, 바로 다음 장면에서 장난기 많은 16살 소녀 시절로 순식간에 캐릭터를 전환한다. “동물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16살 땐 ‘나는 16살 송화다’, 60살 땐 ‘나는 60살 먹은 소리꾼 송화다’만 생각해요.” 송화가 눈이 먼 뒷부분은 ‘정말로 안 보인다’고 믿다 보니 소품 천을 엉뚱하게 잡아 곤란했던 적도 많단다. “바보죠. 실제론 눈을 뜨고 있으니 보면 되는데.”(웃음)
뮤지컬 원작이 1976년 발표된 단편이다 보니 지금 가치관으로 봐선 납득하기 힘든 대목도 있었다. 득음을 바란 아버지 유봉에 의해 원치 않게 눈이 멀어버린 송화가 그런 한(恨)을 껴안고 소리꾼이 된다는 내용이 특히 그렇다. 올 4월 첫 에세이집 『오늘도 자람』(창비)에서 조선시대 성역할·가치판단이 스민 판소리 사설들과 “종종 멱살 잡고 싸운다”고 썼던 이자람이다. 그는 “이 건(송화가 눈머는 설정) 완전 가정폭력 아니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며 "이 서사를 어쩔 수는 없으니 송화는 송화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연 처음 할 때부터 ‘송화가 눈이 안 멀었어도 현재의 마지막 장면처럼 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됐을 것’이라 말해왔다”고 했다. “유봉은 송화를 믿지 않고 호들갑을 떨어 이 사달이 났지만, 저는 송화가 소리 좋아하는 아이에서 소리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자신에 대한 믿음, 똑같은 화살표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했다.  
이번 공연에서 송화가 동생 동호에게 “너는 네 소리 찾았냐”고 묻는 대사가 처음 들어가게 된 것도 제작진의 그런 고민에서 나왔다. “그 대사 하나가 지금 대본에선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뮤지컬 ‘서편제’를 다시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겠지만 판소리 하는 여성의 인생 여정을 다루는 이야기라면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브레히트·헤밍웨이…해외 원작으로 판소리 세계화

이자람은 “소리꾼 이자람으로 평생 무대에 서왔는데 뮤지컬(‘서편제’)은 제가 아니라 ‘송화’가 되어 다른 캐릭터, 관객들을 만나는 게 굉장히 다르고 감각적으로 달콤하다”며 “살아있는 다른 대상과 무대에서 만나는 게 좋아서 지난해 연극(‘오일’)도 했다”고 했다. 사진 페이지(PAGE)1

“내 삶의 가장 뿌리는 판소리”라는 그는  올들어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국악이 퇴출 위기에 처하자 비판의 목소리도 냈다. 5살 때 국민 꼬마 가수 ‘예솔이’(예명)로 데뷔한 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만난 첫 스승의 권유로 소리꾼 외길을 걸어온 터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을 판소리로 재창작한 ‘사천가’(2007) ‘억척가’(2011) 등 해외 원작으로 판소리 저변을 넓혀 세계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2019년 초연한 헤밍웨이 소설 원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지난 9일 영국 런던 공연에 이어 연말부터 서울에서 공연한다. 12일까지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창극 ‘나무, 물고기, 달’의 작창·음악감독도 맡았다. ‘노인과 바다’는 공연 준비와 함께 서울대 국악가 박사과정 논문 주제로 삼아 마무리 집필 중이다. 모든 공연 일정이 끝나면 다음 창작 판소리의 토대가 될지 모를 책들에 묻혀 휴가를 즐길 작정이라 했다.  
“책을 하도 못 읽어서 강퍅해졌어요. 스케줄이 좀 마무리되면 제주도에 책 싸 들고 가려고요. 책도 나는 직관적으로 고르거든요. 이번엔 올가 토카르추크(노벨문학상 수상 폴란드 작가) 같은 여성 소설가들의 문학을 읽어보려 합니다.” 

뮤지컬 '서편제'에서 소리꾼 송화 역의 이자람이 열창하고 있다. 사진 페이지(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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