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날아오던 英 '국민 불륜녀'…호감도 1%서 반전 일어난 그날 [후후월드]

중앙일보

입력 2022.09.17 05:00

수정 2022.09.17 21:30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용어사전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오, 이런. 정말 싫어. 빌어먹을 펜을 참을 수가 없어.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찰스 3세 국왕) 
"(잉크가 흐르는 펜을 받아들고) 어머나, 사방으로 흘러내렸네" (커밀라 왕비)

찰스 3세(왼쪽) 영국 국왕과 커밀라 왕비가 지난 1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을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3일(현지시간) 찰스 3세(74) 영국 국왕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인근 힐스버러성을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할 때 벌컥 짜증을 냈다. 펜의 잉크가 흘러 손에 묻자 벌떡 일어나며 옆에 서 있던 커밀라(75) 왕비에게 펜을 건넸다. 커밀라 왕비는 당연하다는 듯 엉망진창이 된 펜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 찰스 3세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꺼내 자기 손에 묻은 잉크를 닦느라 바빴다. 커밀라 왕비는 보좌진이 와서 문제의 펜을 가져가자, 별일 아니라는 듯 양손에 잉크를 털었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장면이었지만, 커밀라 왕비가 찰스 3세를 어떻게 내조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찰스 3세는 엄격한 왕실 의무를 짊어진 탓인지 예민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찰스 3세의 짜증을 받아준 이는 지난 50여년 간 그의 곁을 지킨 커밀라 왕비였다. 
 

찰스 3세 국왕이 지난 10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치른 즉위식에서 선언문에 서명할 때 탁자 위의 펜이 문제를 일으키자 보좌진에게 치우라고 손짓하며 언짢은 내색을 보이고 있다. JTBC캡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한 다음 날인 지난 9일 찰스 3세가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커밀라는 왕비가 됐다. 전 세계 언론은 “영국에서 한때 가장 미움받던 여성이 왕비 자리에 올랐다”며 커밀라 왕비를 ‘인내’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영국에서 커밀라 왕비는 ‘국민 밉상’이었다. 2020년 영국인 대상 유고브의 여론조사에서 호감도는 불과 1%였다. 찰스 3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고(故) 다이애나비를 사랑했던 이들은 그가 왕비가 되는 것에 마뜩잖아했다. 그런데 지난 13일 ‘커밀라가 왕비 역할을 잘할까’란 여론조사에선 53%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부정적이라는 답은 18%였다. 국민 밉상은 어떻게 ‘호감형’이 됐을까. 
 

찰스 3세 군대 간 사이 딴 남자와 결혼

 
커밀라 왕비가 국민 밉상이 된 건 ‘불륜녀’라는 굴레 때문이다. 그는 1971년 스물 네살 때 폴로 경기장에서 찰스 3세를 만났다. 피플지에 따르면 첫 만남에서 “우리 외증조할머니(앨리스 케펠)가 당신 외고조할아버지(에드워드 7세)의 정부(情婦)였던 걸 아나요?”라는 농담을 건넸다는데, 그도 역시나 같은 길을 걸었다. 참고로 케펠도 남편과 두 딸이 있던 29세에 56세였던 에드워드 7세를 만나 10년 넘게 정부로 지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찰스 3세는 말이 잘 통하는 커밀라 왕비에게 빠져들었다. 1947년생인 커밀라 왕비는 남작의 외손녀로 귀족 혈통이지만, 어머니가 작위 없는 남성과 결혼해 귀족 지위는 얻지 못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커밀라 왕비는 스위스 피니싱스쿨(상류사회 소녀들에게 에티켓·교양·문화 등을 가르치는 곳)을 나오고 독서를 좋아해 박식했다. 
 
그런데 만난 지 1년도 안 됐을 때 찰스 3세는 입대했다. 그 사이 커밀라 왕비는 사업가인 앤드류 파커 볼스와 결혼했고 아들 톰과 딸 로라를 출산했다. 찰스 3세는 커밀라 왕비가 파커 볼스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낙심했다고 한다. 
 
커밀라 왕비와 찰스 3세가 헤어진 이유 중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반대했다고 전해지지만, 더타임스는 커밀라 왕비가 찰스 3세보다 파커 볼스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고 전했다. 
 
스토리는 복잡하다. 커밀라 왕비 전기를 쓴 페니 주너 왕실 전기작가는 “원래 커밀라 왕비는 파커 볼스와 연인이었다. 하지만 바람기에 질려 헤어진 상태였다”면서 “파커 볼스는 찰스 3세 여동생 앤 공주와 만나고 있었는데, 그걸 안 커밀라 왕비가 복수를 위해 찰스 3세를 유혹했다”고 했다. 
 
커밀라 왕비는 파커 볼스와 결혼했으나 그가 자신의 친구와도 바람을 피워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때 찰스 3세가 커밀라 왕비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줬다. 당시까지 커밀라 왕비는 대외적으로 ‘여사친(성별이 여자인 친구)’이었다. 찰스 3세는 커밀라 왕비가 낳은 아들의 대부가 됐고, 다이애나비와 결혼식에도 초대했다. 1980년대에 다이애나비와 커밀라 왕비가 함께 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찰스 3세(왼쪽) 영국 국왕이 지난 1992년 11월 고 다이애나비와 서울을 방한했을 때 모습. AFP=연합뉴스

 
둘은 곧 은밀한 만남을 시작했다. 다이애나비가 1992년 발표한 자서전에서 둘의 불륜 관계를 폭로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활발한 자선활동으로 세계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다이애나비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커밀라 왕비는 국민 밉상을 넘어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이듬해엔 찰스 3세와 커밀라 왕비가 전화로 농밀한 성적 대화를 나눈 것까지 언론에 공개됐다. 수세에 몰린 찰스 3세는 결국 불륜 관계를 인정했다. 여기에 다이애나비가 BBC 인터뷰에서 “이 결혼에는 항상 셋이 있어서 좀 복잡했다”며 쐐기를 박았다. 다이애나비가 한 파티에서 커밀라 왕비에게 “둘 사이를 알고 있다”고 하자, 커밀라 왕비가 “당신은 다 가졌는데 뭘 더 원하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알려지며, 커밀라 왕비에 대한 비난은 정점에 달했다. 
 
당시 영국에선 찰스 3세의 왕세자 직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또 커밀라 왕비는 동네 슈퍼마켓에 갔다가 빵에 맞고 욕설을 들었다고 익스프레스가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당시 영국 사회를 지켜본 정치 평론가를 인용해 “런던에선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았다”고 했다. 
 
결국 찰스 3세와 다이애나비, 커밀라 왕비와 파커 볼스 부부는 모두 이혼했다. 다이애나비가 199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떠나면서 그렇게 세기의 삼각관계는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애나비 죽고 재혼, 거센 비난 견뎌 

찰스 3세(왼쪽) 영국 국왕이 지난 2005년 4월 커밀라 왕비와 결혼식을 마치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1999년 찰스 3세가 커밀라 왕비와 한 파티에 참석한 모습이 언론에 포착된다. 2003년에는 찰스 3세가 지내던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동거를 시작하더니 회갑이 가까웠던 2005년에 결혼까지 했다. 
 
그러자 영국에선 “찰스 왕세자가 국왕이 되더라도 커밀라에게 왕비 호칭을 줄 수 없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고, 왕실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랑을 얻었지만 인정받지 못했으며, 불륜녀 낙인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커밀라 왕비는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한 영국 언론인은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일절 말하지 않고 견뎌서 그가 매 순간 어떤 감정이었는지 오직 추측만 할 뿐”이라면서 “침묵과 신중함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표현했다. 
 
불륜녀라는 꼬리표를 떼고 사람 자체만 본다면 커밀라 왕비는 꽤 평이 좋다. 따뜻함·이해심·안정감 등이 그의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13세에 궁을 떠나 엄격한 기숙학교에 가서 강한 왕세자로 길러졌던 찰스 3세에겐 넓은 품이 있는 커밀라 왕비가 탈출구였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커밀라(오른쪽) 영국 왕비가 지난 6월 런던 버킹엄궁에서 열린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윌리엄 왕세자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가디언에 따르면 커밀라 왕비는 비호감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유명한 홍보 전문가를 고용했다. 그가 왕실 가족들과 잘 지낸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에 해리 왕자도 “못된 계모가 아니다”고 했고, 윌리엄 왕세자는 커밀라 왕비의 딸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조용히 내조하는 한편 왕실 직원에게 소탈한 유머를 선보이며 왕실에 스며들어 갔다.
 

올 초 여왕에게 51년 만에 인정받아  

고 엘리자베스 2세(왼쪽) 영국 여왕이 지난 2012년 6월 런던 템스강에서 열린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커밀라 왕비와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가 하는 자선활동을 커밀라 왕비에게 많이 맡겼다. 그리고 지난 2월 여왕은 “찰스가 왕이 된다면 커밀라가 ‘왕비’라는 칭호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난 6월엔 여왕이 개인적으로 수여하는 최고의 기사도 훈장인 가터 훈장도 받았다. 이는 다이애나비도 케이트 왕세자비도 받지 못한 것이다. 
 
여왕의 지지를 받은 후, 커밀라 왕비의 영국 내 호감도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한때 커밀라를 욕했던 75세 노인 여성은 NYT에 “다이애나비가 죽었을 때 아주 슬펐고 커밀라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커밀라와 찰스가 서로를 아끼고 나라를 위할 것이라고 믿게 됐다”고 했다. 그를 비난했던 영국 언론도 돌변했다. 데일리메일은 “다이애나비를 따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성공했다”고 표현했다.  
 
지난 6월 보그 인터뷰에서 커밀라 왕비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쉽지 않았어요. 인내하고 극복하고 계속 나아가야 했어요.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후후월드]를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구독하세요. 세계를 움직이는 이슈 속에 주목해야 할 인물을 입체적으로 파헤쳐 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