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술에 무엇을 곁들이시나요. 맛있는 안주, 아니면 신나는 음악? 혹시 소설과 영화는 어떠세요?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술을 마시는 시간은 색다른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술 마시는 바와 심야서점이 더해진 공간, ‘책바(Chaeg Bar)’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죠. 책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등장인물의 심리, 장면의 분위기, 상황의 메시지를 전달하곤 합니다. 책과 영화 그리고 술을 사랑하는 정인성 대표가 맛있는 술과 가슴속에 깊이 남을 명작을 함께 추천해 드립니다.
2주 만에 영화 ‘헤어질 결심’을 다시 봤다.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재차 보는 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TENET)’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극장으로 발걸음이 향했던 ‘테넷’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든 여운이 옅어진 후에서야 다시 보고 싶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열한 번째 장편 영화다. 그의 영화 중에는 인상적으로 본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직까지 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있다. 충성심으로 몇 차례 관람하는 팬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계속 생각나도록 이끌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뿐만 아니라 기도수는 눈에 안 보이는 곳만 골라 가정폭력까지 가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존재했지만, 살인 동기 역시 충분했다. 심지어 과거에 엄마까지 사망에 이르도록 만든 기록이 발견됐고, 답답해진 해준은 서래의 집에 찾아간다. 그때 카메라는 서래의 집을 훑으며 술 한 병을 잠시 비춘다.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Kavalan Solist Oloroso Sherry Cask)’다. 수많은 술 중에서 왜 하필 싱글몰트 위스키가, 그것도 카발란이 그녀의 집에서 등장했을까.
한편, 카발란은 아열대 기후인 대만에서 탄생했다. 저위도 지역 생산 자체에 만족하지 않고 뛰어난 품질의 위스키를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브랜드다. 2005년 양조장이 만들어진 이후로 세계 유수의 주류 품평회에서 500여 개가 넘는 상을 받았으며, 2017년에는 위스키 신생국 중 최초로 런던 국제주류품평회(IWSC)에서 올해의 디스틸러를 수상했다.
카발란 이야기는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하지만, 술을 못 마시거나 소주와 맥주만을 사랑하는 애주가에게는 아마도 낯설 것이다. 즉, 카발란이 집에 있다는 것은 기도수가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겼던 사람이란 사실을 내포한다. 고상함을 지향하는 그의 취향은 평소에 롤렉스 데이데이트를 착용하고, 말러의 5번 교향곡을 들으며 등산하는 습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라는 직업을 이용해서 30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위스키를 뇌물로 받았을 것이라는 점도 유추해볼 수 있겠다.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는 카발란의 다양한 라인업 중에서 이름 그대로 셰리 와인(스페인의 주정강화 와인)의 뉘앙스를 전달하는 위스키다. 증류 작업 후 스페인 헤레스 지역의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에 넣어 숙성한다. ‘올로로소(Oloroso)’는 스페인어로 향기롭다는 뜻으로 셰리 와인의 여러 스타일 중에서 진하고 묵직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는 한 모금 머금으면 통후추를 어금니로 쪼개서 먹는듯한 스파이시함이 퍼지고, 입안에서 천천히 굴리면 오일리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일반적인 셰리 캐스크의 말린 과일 향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피어오른다. 생전에 기도수는 계단 높이로 138층에 해당하는 구소산 정상에 올라간 뒤, 말러 교향곡 5번의 5악장을 들으며 플라스크로 한 모금 마셨을 것이다. 분명 땀 흘린 노력을 보상받는 맛이었으리라.
‘헤어질 결심’은 이렇게 사소한 장치인 술에서조차도 의미와 은유가 촘촘히 담긴 영화다. 하물며 인물들의 대사, 행동 하나하나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겼을 것인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생각나는 영화다. 카발란은 영화 덕분인지 2022년 상반기 판매량이 전년 대비 427%나 증가했다고 한다. 마침 책바에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가 한 병만 남아 거래처에 연락해보니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회신을 받았다. 아쉽지만 이렇게 카발란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 이과두주는 웬만한 마트에서도 구할 수 있다.
정인성 책바 대표, 작가 cooki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