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피싱조직도 놀라 캐물었다, 232억 손해입힌 경찰 비결

중앙일보

입력 2022.07.29 05:00

수정 2022.07.2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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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강원경찰청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 수사관들이 보이스피싱 조직 사무실에서 압수한 전화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 박진호 기자

강원경찰청 스팸 문자 가려내 차단

지난 6일 오후 울산광역시 울산구치소 접견실. 강원경찰청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 소속 수사관이 자리에 앉자 한 남성이 “우리 전화번호 어떻게 정지시키는 거예요”라고 대뜸 물었다.
 
30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는 필리핀과 한국을 오가며 범죄에 쓰일 전화번호를 수집해 조직에 넘기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불안함을 느껴 지난달 입국해 자수했다.
 
A씨는 “원래 (보이스피싱) 문자를 보내면 당일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와야 하는데 얼마 전부터 문자를 아무리 뿌려도 연락이 오지 않아 확인해보면 정지돼 있었다”며 “경찰이 직접 (보이스피싱 관련) 번호를 차단하는 것을 알게 된 뒤 긴급 대책회의까지 열었다”고 말했다. A씨는 이날 수사관에게 “도대체 어떤 방식이길래 그렇게 빨리 정지가 가능한지 궁금하다”며 차단 방식에 대한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강원 경찰의 역공…9개월간 ‘9576건’ 정지시켜 

해외 발신 인터넷 전화번호를 국내 휴대전화 발신 번호로 무단 변경하는 '변작 중계기'. [사진 강원경찰청]

이처럼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번호 차단 방식에 궁금증을 갖는 건 본인들 조직에 큰 피해가 발생하고 있어서다. 강원경찰청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 '전화금용사기 스팸 문자 사전 정지 및 경고 시스템 TF팀'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보이스피싱 조직은 동일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평균 3만4697명에게 발송한다. 문자메시지 1건당 요금 70원이 부과되는 것을 고려하면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242만7530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는 지난해 10월 19일부터 지난달 말까지 9576건의 번호 정지를 통신사에 요청했다. 1건당 242만7530원의 비용이 발생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동안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 끼친 피해는 232억4602만원에 달한다. 박승율 수사관은 “저금리 대출이나 대환대출 유도 문자, 정부 정책 손실지원금 안내 등 내용이 포함된 문자 메시지는 받는 즉시 스팸신고 해야 피해를 예방하고 보이스피싱 조직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보이스피싱에 사용되는 번호를 실시간으로 정지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매년 증가하던 피해도 감소추세다. 올해 1~5월에 발생한 피해 건수는 1만707건(2622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만4835건(3536억원)과 비교해 4128건(914억원)이나 줄었다. 반면 이 시스템이 구축되기 전까진 수법이 지능화하면서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매년 증가해왔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3만982건이 발생해 역대 최고 피해액인 7744억원을 기록했다. 2020년엔 3만1681건(6398억원), 2019년 3만7667건(7000억원), 2018년 3만4132건(5006억원)에 이른다.
 

‘232억원’ 손해 본 해외 보이스피싱 조직 ‘긴급회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지난 20일 강원경찰청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 수사관이 보이스피싱이 의심된다며 스팸 신고된 전화 번호를 정지하는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그렇다면 강원경찰청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는 어떤 방식으로 번호를 차단할 수 있을까. 우선 전문적으로 번호 차단을 담당하는 수사관이 있다. 이 수사관은 한국인터넷진흥원과 공조를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이 보낸 것으로 의심되는 스팸 문자를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이후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판단되는 번호를 취합해 곧바로 통신사에 정지를 요청한다. 과거엔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해야만 정지가 가능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부터 강원경찰청이 한국인터넷진흥원·통신사 등과 ‘전기통신금융사기 근절’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통합문자차단시스템’이 구축됐다. 이에 실시간 분석을 통해 빠르면 5분 만에도 번호를 정지할 수 있게 됐다.
 
시스템 구축 초반에는 하루 200건이 넘는 신고 번호를 정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최근엔 보이스피싱 관련 메시지가 줄면서 하루 20~40건 정도 접수된 신고 번호를 통신사에 정지해달라고 하고 있다.
 

지난해보다 4128건, 914억원 피해 감소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경찰이 피해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자 보이스피싱 조직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범죄에 활용하던 번호가 줄줄이 정지되자 번호 수집 방식이 진화하고 있다.
 
김모(55·여)씨는 최근 ‘드라마 시청률 조사 요원 모집’이라는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부업을 할 겸 문자가 발송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상담원과 통화를 했다. 당시 상담원은 “TV 시청을 하며 주 2회 설문에 참여해야 하는데 KBS·MBC·SBS·EBS 등 4개 방송국 전화선이 필요하다”며 “KT에서 일반전화 4대를 개통하고 알려주는 전화번호로 착신전환해 놓으면 월 80만원을 주겠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곧바로 KT에서 일반전화 4회선을 개통하고 상담원 안내에 따라 착신전환을 했다. 하지만 이 번호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미끼 문자를 발송하는 번호로 사용됐다.
 
서울시 관악구의 한 모텔도 지난 13일 KT 직원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이 조직원은 모텔 주인에게 “모텔 번호가 보이스피싱에 이용돼 당분간 착신전환을 해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모델 주인은 안내에 따라 착신전환을 했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해제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모텔 전화로 대출 관련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고 한다.
 

‘시청률 조사’ ‘KT 직원 사칭’ 각별히 주의해야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모텔 주인은 경찰에서 “착신전환을 풀자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부터 왜 착신전환을 풀었냐는 항의까지 받았다”며 “30년을 사용한 번호인데 범죄에 노출돼 피해가 크다”고 하소연했다.
 
강원경찰청 박근호 보이스피싱범죄수사대장은 “수사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범죄 의심 번호 차단 등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며 “최근에 보이스피싱 조직이 범죄에 활용할 번호를 확보하기 위해 통신사 직원을 사칭하거나 시청률 조사 요원 모집 등을 활용하는 만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