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에도 러시아군의 민간시설 포격이 이어졌다. 특히 마리우폴 어린이 병원이 폭격을 당하며 최소 17명이 숨지거나 다친 것으로 파악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아이들을 치료하던 의료시설이 파괴됐다. 환자와 아이들이 잔해 밑에 깔렸다”며 “이건 전쟁 범죄이자 우크라이나인 집단 학살의 확실한 증거”라고 비판했다.
앞서 러시아군의 폭격에 민간인들의 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여부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와 수백만명의 피란민을 야기한 '전쟁 원흉'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처벌도 가능할까. 과연 무슨 혐의를 적용해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민간인 무차별 폭격… “전쟁 범죄, 합리적 근거 있다”
현재 러시아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인 국제형사재판소(ICC)는 국제 사회에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해당 국가가 기소할 수 없을 때, 개인을 수사하고 처벌하는 유일한 상설 국제기구다. 과거 나치 전범을 처벌했던 ‘뉘른베르크 재판’을 제도화한 격이다. ICC가 다루는 범죄는 집단살해(genocide, 제노사이드), 전쟁범죄(war crime), 반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 침략범죄(crime of aggression) 등 네 가지에 한한다.
지난 2일 ICC 회원국 39개국은 ICC에 러시아 전쟁 범죄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이날 카림 칸 ICC 검사장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볼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며 조사 개시를 밝혔다.
가디언은 이에 대해 “전쟁 범죄는 고의적인 살상·광범위한 파괴·의도적인 민간인 포격 등을 포함하고 있고, 반인도적 범죄는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 등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군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금지되는 민간인 상대의 무차별적 폭격 외에 진공폭탄(열압력탄) 등 민간인 살상 무기를 사용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그 외 범죄의 경우, 비회원국이어도 해당 국가가 ICC의 관할권을 인정하면 ICC는 조사를 진행할 수 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이 경우 ICC는 해당 영토에 대해 관할권을 갖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해 러시아의 고위 관계자들을 기소할 수 있다.
‘살아있는 권력’ 처벌 사례 없어
포린폴리시는 “ICC가 푸틴 대통령을 전쟁 범죄 등으로 기소할 수 있지만, 그가 재판을 받을 가능성은 작다. 현직 국가 원수들은 수년간 성공적으로 ICC의 구속력을 피해왔다”고 짚었다. ICC가 기소한 46건 중, 현직 국가원수를 기소한 사례는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과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두 차례에 불과하다. 더구나 경찰력과 자체 병력이 없는 ICC의 경우 강제 체포가 불가능해 기소한다고 해도 현직 권력자를 법정에 세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푸틴 대통령의 경우 세계 강대국 러시아의 지도자인 만큼 더욱 처벌이 쉽지 않다. ICC는 창설 이후 강대국보다는 아프리카 전쟁 범죄만 다룬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ICC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미군의 전쟁범죄 수사를 시도했지만, 매번 무산되거나 한 번도 관련자를 기소하지 못했다.
가능성은… “쿠데타 후에야 가능할 수도”
포린폴리시는 “러시아 지도부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건 분명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ICC 회원국 3분의 1인 39개국이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수사를 요청했다. 미래에 이 국가들이 자국을 방문하는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러시아 군 지도부를 ICC에 넘길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