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4시 30분(한국시간 3일 0시 30분) 폴란드-우크라이나 접경의 메디카 검문소 50m 밖에서 취재 중이던 기자는 얼떨결에 폴란드 기자 10여 명을 따라 국경 쪽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이날 유럽연합(EU)의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의 윌바 내무담당 집행위원, 야네스 위기관리 담당 집행위원이 우크라이나에서 넘어오는 피란민 실태를 파악하고자 국경 검문소를 방문했던 것이다. 어디까지 들어가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5분가량 따라갔다. 휴대전화에 찍힌 시간을 보니 갑자기 오후 4시 35분에서 오후 5시 35분으로 바뀌었다. 우크라이나 시각으로 자동 전환된 것이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시차는 1시간. 깜짝 놀라 "이미 우크라이나 땅을 밟은 것 아니냐"며 국경수비대 직원에 물어보니 "우크라이나 경계선에 거의 다 가면 종종 그렇게 된다"고 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폴란드 접경을 가다⑤
현장에 있던 윌바 EU 집행위원은 "EU 차원에서 피란민들의 입국을 용이하게 하는 운영지침을 제시할 것"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폴란드 기자는 "하루에 평균 10만 명이 넘어오는데 입국 심사관은 예전과 다름없이 3~4명인 게 말이 되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날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러시아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피란민은 100만명을 넘어섰다. 전체 국민(약 4400만명)의 2%가 넘는 인원이 일주일만에 해외로 빠져나갔다.
도보가 아니라 차량으로 국경을 빠져나오는 이들도 지체 되긴 마찬가지였다. 'UA(우크라이나)' 번호판의 우크라이나 차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대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쪽 검문소를 통과해 도보로 이동하는 피란민 중에는 다리를 절뚝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가족들은 그를 팔로 부축했다. "얼마나 오래 걸었으면…"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야네스 EU 집행위원은 "저들을 보라. 유럽에서 지난 수십년간 보지 못했던 대재앙의 현장이다"고 했다.
2일 오후 6시 국경도시 프셰미실 중앙역 5번 플랫폼.
650㎞ 떨어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역에서 32시간 걸려 도착한 이리나(47)는 생후 18개월 된 딸과 6살 아들 손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휴대전화 전원도 끊기고 말 그대로 춥고 배고픈 여정이었지만 "서부 도시 리비우까지 세 곳에서 정차했는데, 그때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힘내라'며 열차 안으로 음식을 넣어줬다"고 전했다. 플랫폼 주변에는 독일·스위스·이탈리아·스페인으로 무료로 보내주겠다는 안내 팻말을 든 시민들로 북적였다.
독일 안나레나 배어복 외무장관은 1일(현지시간) 유엔 연설에서 "러시아가 공격한 것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엔의 룰(rule), 국제사회의 질서다. 그래서 이 전쟁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정의냐 강자의 욕망인가, 행동할 것인가 못 본 체할 것인가. 집에 돌아가 가족과 친구에게 그걸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경 검문소 난민, 생업을 뒤로 하고 자원봉사를 위해 멀리 수백㎞를 달려온 시민들,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