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특례법)에서 정한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한 영상녹화진술을 형사 법정 증거로 사용하는 걸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과잉금지원칙 위반이 이유였다.
현행 성폭력 특례법은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피해 진술을 할 때 영상녹화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수사기관 혹은 법원은 피해 아동을 다시 소환하지 않고 이 피해진술 영상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결정으로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은 영상녹화물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서 증언하고 피고인 측 반대신문에 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피해자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헌재 결정 후 피해자지원단체 등에서는 "미취학 피해 아동까지 법정에 세우겠다는 것이냐"며 반발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아동이든 성인이든 피해자 말이라고 다 믿어야 하는 건 아니다"면서 반긴다.
법률사무소에서 단둘이 만나 피해를 이야기할 때는 세세한 내용까지 말하다 법정 증인석에 앉아서는 그저 "예, 아니요" 정도의 말밖에 못 한 학생, 피고인 측 변호사의 교묘한 말꼬리 잡기 신문에 말려들어 속수무책 추궁을 당하던 학생, 공소사실과 무관하지만 사소한 거짓말이 드러나 무죄판결 난 사건….
표현 못한다고 피해를 부정당해서야
2차 가해 빈번한 법정
그런 판사들 눈높이에서 봤을 때 법정 증인석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피해자는 뭔가 거짓말을 해서 겁먹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공소사실과 관련 없는 부수적 내용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짓 발언이 드러나면 중요 범죄사실에 대한 증언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는다.
피해자들 기억 속 피해 경험을 제대로 진술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문이 열려야 기억의 문이 열리고, 기억의 문이 열려야 상세히 진술할 수 있다. 그게 실체적 진실 발견의 열쇠가 된다.
이번 헌재 결정으로 아동·청소년은 무방비 상태로 법정에 서야 한다. 처음 만난 어른들 앞에서 자신의 피해에 대해 오류 없이 모순 없이 진술해야 한다. 발생 1년도 더 지난 일일 수도, 경찰과 검찰에서 이미 몇 차례 진술을 한 이후일 수도 있다. ‘언제까지 이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고 내뱉어야 하나, 괜히 신고했나'라는 후회가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압도할지 모른다.
이제라도 빨리 피해 아동·청소년이 법정에서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 최소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신속한 수사 및 재판 진행, 공정한 재판절차 참여권 인정, 엄중한 책임 부담 등의 조치 등이다.
우선 신속한 사건 진행을 위해 처리 기간을 명문화해야 한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1년 이상 지난 상태에서 피해 아동을 법정에 세우고, 잊기 위해 노력하는 사건을 다시 세세하게 떠올리게 하는 건 그 자체로 2차 가해다.
피해자도 재판에 참여해야
세 번째로, 독일 형사소송법에서처럼 아동·청소년 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사항은 재판장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 피해자 증언을 탄핵하기 위한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사항은 곳곳에 함정이 숨겨져 있다. 그 질문의 법적, 사회적, 맥락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 어린 피해자가 정교한 답변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피고인의 반대 신문권 보장은 반대신문을 통해 피해자의 기존 진술 중 왜곡이나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동요시키거나 흥분·좌절시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어렵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방어권 향유에 대해선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고의로 피해자가 입지 않아도 되는 2차 피해를 보게 했다면 유죄판결 시 가중요소로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동안 지원했던 사건 중 특히 어린 피해자를 떠올려 본다. 피해 말하기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상처였다. 끊임없는 진실성을 의심받는 사건 진행 과정, 왜 더 일찍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이 고스란히 그들의 맨살에 송곳처럼 박혀 들었다. "말하지 말걸 그랬어요, 그냥 참을 걸 그랬어요, 아무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잖아요, 지금이 그때보다 더 힘들어요"라며 후회하던 어린 피해자들의 고통의 무게를 떠올려봤다.
저울 한쪽에는 피해 아동이 앉아 있다, 또 다른 저울에는 가해자가 앉아있다. 그 무게는 어떻게 재야 할까? 눈에 보이는 균형만 맞추면 되나. 피해 아동의 가슴속에 똬리 틀고 있는 성폭력의 상처, 고통의 무게를 우리는 합산하고 있는가? 적어도 피고인의 방어권 무게만큼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공정한 것이다.
[김대근의 인정불가]피고인 방어권 보장은 헌법적 가치다
[별별시각]헌법재판소 결정문과 소수의견
[별별시각]헌법재판소 결정문과 소수의견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 관련 헌재 결정을 비판하는 김재련 변호사의 글에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법무정책연구실장이 보내온 답글 형식의 칼럼을 붙입니다. 또 헌재 결정문을 소수의견과 함께 소개합니다. 전문은 중앙일보 사이트(www.joongang.co.kr/series/11534)의 김재련 칼럼 하단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