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였던 지난달 31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입원실. 병상에 누운 안은주(54)씨가 반가운 듯 옅은 미소로 언니 안희주씨를 맞았다. 그는 목 절개로 말은 잘 못 하지만, 지난해까진 손글씨로 자주 대화를 나눴다. 은주씨는 1700명 넘는 이의 목숨을 빼앗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다.
하지만 최근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반신 마비에 의식까지 혼미해졌다. 오른팔마저 굳어가는 위독한 상황에도 힘겹게 펜을 잡고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를 썼다. '사랑해, 가지마.' 희주씨는 "가지 말라고 할 때마다 발길이 안 떨어진다. 주치의 말처럼 하늘에 맡긴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도 은주씨는 삶의 끈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희주씨는 "동생이 팔순 노모를 보러 고향에 내려가는 희망만 갖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앰뷸런스 타고 같이 가자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끝 없는 치료의 터널…빚더미 빠진 피해자들
이미 1700여명이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피해자와 가족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 뒤엔 끝없는 치료에 지친 일상과 부채만 남았다. 2년 전 중증 폐질환에 걸린 부인을 잃은 유족 김태종씨는 "그간 많은 이의 가정 파탄과 수많은 빚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거냐"고 울분을 토했다.
비교적 경증인 피해자나 사망자 유족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조정안에 따른 지원금이 들어온다해도 지금껏 쌓인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중증, 경증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치료의 터널을 계속 걸어야 한다. 이들이 "조정안에 향후 치료비 전액 보장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대선 후보도 무관심…"잊혀지는게 무섭다"
부인과 장모가 숨진 유족 송기진씨는 "사망자가 수천명인 사건인데 조용히 묻혀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할 때는 다 해결한다 해놓고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참사를 알리려 1인 시위에 나섰다는 안희주씨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 보상을 받고 끝난 줄 알고 있다. 돈 몇푼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게 싫다"고 했다.
피해자 인정 심사 기다리는 3000명
길게는 몇년씩 걸리는 피해 인정 심사도 문제다. 현재 3000명 넘게 정부의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형을 폐암으로 떠나보낸 김종제씨는 "돌아가신 형님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건 맞다는데, 피해 여부는 아직도 심사 중"이라며 "제대로 된 장례는커녕 빚만 쌓이고 있다"고 털어놨다.
환경부 관계자는 "사망한 분들을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와의 관련성을 심층 검토하면서 최대한 신속히 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향후 조정안을 거부한 피해자에겐 정부가 구제 급여를 지급하는 등 지원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