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조항은 검사가 작성한 피신조서는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공판에서 그 내용을 인정할 때에만 증거로 쓸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존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됐다는 게 피고인 진술로 인정이 되고,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증명된 때 증거로 할 수 있다’는 기존 조항보다 더 범위를 좁혔다.
기존엔 검찰에서 강압·회유 없이 본인의 의지대로 진술한 대로 기재됐다는 점이 인정되면 증거로 인정됐지만, 내년부턴 피고인이 검찰에서 진술했더라도 법정에서 불리하다고 판단해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앞서 지난해 2월 개정 때 형소법 312조 2항 영상 녹화된 피신조서의 증거 인정 조항은 통째로 삭제됐다. 피고인이 검사가 작성한 조서 내용을 부인할 때에도 영상녹화물이나 그 밖의 객관적 방법으로 피고인 진술 내용과 동일하다고 증명될 경우 증거로 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코앞으로 다가온 내년 벽두부터 형사재판 법정 현장의 혼선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1954년 형소법 제정 이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지는 셈이어서다.
왜 檢 피신조서만 증거력 인정해 왔나
형사소송법을 제정한 이들도 고민이 없던 건 아니었다. 수사기관의 조서가 재판에서 증거로 쓰이게 되면 수사기관이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등 강압적인 수사를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당시는 일제 고문 경찰의 폐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해방 직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피고인이 공판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증거가 될 수 없도록 설계됐다. 문제는 검사가 작성한 조서에도 증거력을 주지 않을지였다.
이와 관련, 한국 형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엄상섭 의원은 1954년 2월 16일 국회 회의에서 “검찰이나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은 피고인이나 변호인 측에서 이의가 없는 한에서만 유죄의 증빙 재료로 할 수 있도록 하면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선 대단히 좋다”면서도 “비교적 경찰보다 인적요소가 조금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검찰이 작성한 조서에까지 증빙력을 주지 않는다면 소송이 지연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검찰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절충이 됐다”고 설명했다.
검찰 피신조서의 증거력은 헌법재판소에서 95년과 2005년 두 차례의 합헌 결정이 나오기도 했다. 다수의견은 ▶준(準)사법기관으로서 검찰의 피신조서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을 때 수사·재판 절차가 지연될 수 있고 ▶검사는 경찰보다 인권유린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었지만 ▶자백 위주의 수사 등 인권 침해 가능성을 높여 실체적 진실을 도외시한다는 반대의견이나 ▶검찰의 피신조서 증거력이 성립하는 요건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한다는 보충의견도 없지 않았다.
정치권과 법조계엔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 피신조서 증거력을 신속히 제한한 데에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의 영향을 꼽는 시각도 있다. 당시 공여자인 한만호(2018년 사망) 한신건영 대표는 “불법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검찰 진술을 법정에서 “준 적 없다”며 번복했다. 그러나 한씨의 진술 번복으로 1심은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한 전 총리 동생이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1억원 수표 등 객관적 증거에 따라 유죄 확정 판결(대법원 전원합의체 만장일치)을 선고했다. 이후 한씨는 별도로 위증죄로도 처벌받았다.
檢 “진실 발견 저해” 辯 “공판중심주의 구현”
차장검사 출신인 권오성 변호사(법무법인 삼우)는 “물적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술 증거가 보완돼야 유의미한 증거가 되는 게 허다하다”며 “피신조서의 증거능력을 날리는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유·무죄의 선택을 피의자가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 변호사는 이어 “더 큰 문제는 검사가 소극적으로 기소할 것이란 우려”라며 “피의자가 검사 앞에선 자백해도 법원에 가면 무죄가 나올지 모르는데 누가 모험적으로 기소하겠느냐. 결국 피해자만 억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 배지훈 변호사(법무법인 화우)는 “검찰에서 한 진술을 증거로 쓸 수 없는 상황이면 재판이 애초 기소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비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변호사 사이에선 “재판이 길어질 우려는 있지만 억울한 피고인의 이익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변화”(한 대형 로펌 변호사)란 평가가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 김태규 변호사는 “실체적 진실 발견에 너무 집착하면 형사 절차가 굉장히 잘못될 수 있다”며 “실제 재판이란 건 실체적 진실 발견뿐만 아니라 공정한 절차적 권리 보장, 인권 보장의 기능도 있는 것인 만큼 판사에겐 부담이더라도 피고인의 증거 활용 측면에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장판사 출신 황정근 변호사(법무법인 소백)도 “공개된 장소에서 하는 진술과 밀실에서 하는 진술은 완전히 다르다. 검찰 조서는 굉장한 압박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이기 때문에 왜곡되기 쉽다”며 “공판중심주의가 기본이란 점에서 올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학계에선 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검·경이 지휘 관계에서 협력 관계로 재편된 마당에 검찰 조서만 증거력을 인정하는 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법무정책연구실장은 “공범 진술의 증거 능력을 제한해서 실체적 진실 발견을 제한할 수 있다는 지적은 기본적으로 검찰이 여태껏 증거에 기반한 수사를 하지 않고 자백이나 진술에 따른 조서에 의존하는 수사를 해 왔기 때문”이라며 “조서라는 건 일방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다원적 대화를 전제로 하는 공판에선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실이 이상을 따라가는 게 맞지, 현실에 맞춰 이상을 낮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수사 동력 유지 위한 보완책 필요”
미국은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유죄협상) 제도를 통해 필요한 사건만 심리하되 공판에선 조서가 아닌 수사기관의 조사자 증언을 이용한다.
한국의 경우도 단순히 검찰의 피신조서 증거능력을 없애는 데 그치지 말고 보완책을 만들어야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단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형소법 개정을 논의한 2018년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일부 보완책이 제시됐다. 당시 정부 측으로 참여한 법무부 박상기 장관과 김오수 차관, 봉욱 대검 차장 등은 모두 검찰의 피신조서 증거력 제한을 반대했다.
이들은 부득이 제한할 경우에도 ▶조사자 증언(조사한 수사기관 관계자가 법정에서 진술) 제도를 활성화하거나 ▶조사 당시 촬영한 녹화영상을 법정에서 재생토록 하는 방안을 병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유죄협상 ▶사법방해죄 ▶허위진술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조사 녹화영상 재생의 경우 “세계적인 추세로 무리가 없는 대안이고, 앞으로 형사재판 전자화도 불가피하다”(김대근 실장)는 의견과 “검찰이 선택적으로 편집한 영상을 재생할 수 있다”(법원행정처)는 견해가 부딪히고 있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힘 있고 돈 있는 피고인에게 특히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경우 미국보다 유죄 형량도 낮고, 유죄협상 제도도 없으니 검찰로선 점점 수사 동력을 잃게 될 것”이라며 “실제 사례가 나온 뒤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보완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