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찢어진 유인물 속 단어들에 일찌감치 매료됐다. 생물학적 나이로는 86세대에 속하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공장에서 평생을 일한 부모님을 보면서 사회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그저 얇은 한 달 월급을 몇십년 간 덧셈만 하고 있는 동안, 누군가의 부모는 복잡한 수식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자산을 증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중학교 수행평가 과제로 나온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정의감을 불타게 하는 데 충분했다. 비슷한 시기 다녔던 논술학원에선 박노자와 유시민의 글을 읽히며 이른바 진보 지식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요구하는 비판적 사고를 장려했다. 그리고 2008년의 광우병 촛불 집회는 결정적이었다. 진보신당의 인터넷방송국 '칼라TV'에서 진중권이 시위를 생중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람직한 공공 지식인의 모델을 발견했다.
중학 수행평가는 '전태일', 시위 현장엔 진중권
이렇게 멀리서나마 진보정치를 동경하던 내게 2011년 들어간 대학은 해방구처럼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팔뚝질을 하는 대학생(운동권을 지칭)은 의협심을 갖췄다. 이들은 당시 이명박 정권에서 진보 진영이 만들어낸 ‘88만원 세대’라는 프레임을 앞세워 무상급식·반값등록금 같은 이슈를 앞세웠다. 이슈에 일단 불이 붙으면 혁명과 투쟁 같은 급진적인 어휘가 뒤따르고 이에 매료된 신입생들은 몰려들었다. 무상급식·반값등록금 정책은 경제적 혜택을 균등히 분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위와 집회에 참가하면서도 솔직히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혜택이 필요한 빈곤층에게 더욱 큰 혜택을 주지 않고 왜 모두에게 혜택을 균등히 나누려 할까? 머리로 이해하기 힘드니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진보 담론이 겨냥한 바는 대중의 기분, 다시 말해 정서였다. 정서적 평등주의는 빈곤층과 중산층 간에 존재하는 위계를 은폐하는 데 탁월했다. 빈곤층은 수혜를 받는다는 찝찝함을 지울 수 있고, 중산층은 자신의 죄책감을 경감할 수 있었다.
가난까지 훔친 86세대 자녀들
나는 진보 성향을 띈 한 친구에게 시골에서 상경해 봉제공장 노동자로 살아온 모친의 삶을 털어놓은 적 있다. 그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우리 할머니도 가난했어”라는 말을 던졌다. 그가 내뱉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 어머니는 어떤 이의 할머니가 사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는 동시대에 얽혀있는 불평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산층인 자신에게서도 가난의 흔적을 찾으려고 혈안이 됐다. 박완서의 통찰력 있는 표현(도둑맞은 가난)처럼 그들은 가난과 같은 타인의 비참까지도 스스럼없이 도둑질했다. 투쟁현장이나 집회와 같은 운동권 의례는 도구화를 더욱 강력하게 추동했다. 중산층 환경에서 벗어나 비참한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은 대학생들은 폐쇄적인 공동체를 일구었다. 집회 참석은 강의 조별과제나 마찬가지였다. 집회를 알리는 SNS 알림은 불참자에게 죄책감을 유발했다. 공동체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란 그들이 정한 도덕이었다. 경계 밖에 있다면, 무엇이든 간에, 비윤리적인 대상으로 공격받았다.
소수자 고통을 이용한 90년대생 운동권
대학 신입생 무렵, 많은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속출한 적 있다. ‘경쟁사회’ ‘신자유주의’와 같은 사회적 요인이 비극을 낳았다는 게 진보 진영의 관점이었고, 많은 대학생이 여기에 동조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원인을 특정 집단이 비판하는 사회적 관점으로만 재단하는 것은 실은 타인의 삶을 함부로 규정하는 행위였다. 오로지 개인만 알 수 있고 개인만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사회적 담론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이용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광경은 학내에서 일어난 한 사회적 비극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는 간담회였다. 학생들은 중앙 식당 앞에서 빙 둘러앉았다. 아무도 얘기를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참석자 중 한 명이 학내 구성원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말한 후에 오랜 침묵이 흘렀다. 간담회에선 어떤 논의도 진행되지 못했다. 개인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를 누구도 함부로 추론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 분명 애통함과 죄책감을 느꼈지만 무얼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사회에 책임을 돌리고 죄책감을 공유하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느꼈던 무기력함은 우리 시대를 이루는 감수성이었다.
조별과제 같았던 집회 참석
철도 민영화 반대 시위는 또 하나의 비현실적 광경을 보여줬다. 경찰은 민노총 위원장을 검거하기 위해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에 강제 진입을 시도했고 집회 참여자들은 진입을 막으려 했다. 나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어떤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운동권이 사회운동을 마치 허구적인 작품처럼 기획하는 이유도 이런 비현실적인 감각을 일부러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는 시위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운동권은 이벤트 업체나 대규모 행사 대행사 같았다. 사회운동은 이렇게 보통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도피처를 제공하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오늘날 이념은 중산층을 치장하기 위한 장신구가 되고 사회운동은 스펙터클을 위한 도구가 됐다. 모든 것이 거꾸로 가고 있었다. 딱 하나, 중산층 출신의 진보 대학생이라는 정체성만은 똑같았다. 시공간은 달랐지만 이미 이들에게 환멸을 느낀 좌파가 일찍이 한 명 있었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파올로 파졸리니(1922~75)는 68혁명에 참여하는 중산층 출신의 대학생들이 경찰을 린치한 사건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증오한다. 마치 내가 당신들의 아버지들을 증오했던 것처럼. 어제 당신들이 경찰을 폭행했을 때, 나는 경찰을 동정했다. 경찰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말도 여기에 있다. 진보 진영을 지지했던 90년대생이 그들에게 등을 돌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