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 명인 1호 다급한 전화 "매화 놀이 다음주면 늦습니더"

중앙일보

입력 2021.03.10 07:00

수정 2021.03.1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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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청매실농원 홍쌍리 명인 인터뷰 

8일 오후 만난 광양 청매실농원 홍쌍리 여사. 활짝 핀 매화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매화 보고 싶으면 바로 내려와예. 못 해도 1주일은 이릅니더. 겨울이 하나도 안 추웠잖습니꺼. 거름 하려고 땅을 뒤비니까예, 세상에, 벌러지가 버글버글합디더.”
 
지난 3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당장 내려가지 않으면 혼쭐이라도 낼 기색이었다. 국내 매실 식품 명인 1호 홍쌍리(79) 여사. 해마다 봄 기척이 궁금하면 전화를 넣어 매화 개화 시기를 물었었다. 아직은 여유가 있겠다 싶었는데, 명인이 전한 화신(花信)은 다급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올봄 매화 놀이는 접어야 할 참이었다. 8일 오후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에서 명인을 만났다. 섬진강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매실나무밭은, 그의 말마따나 활짝 핀 매화로 눈부셨다.
 
선생님 말씀만 믿고 내려왔습니다. 올봄 매화는 얼마나 빠른가요.

예년엔 3월 중순이 돼야 피기 시작했어예. 그래서 하순에 축제하고 그랬잖아예. 올해는 아니야. 3월이 되니까 막 피어나요. 매화 심은 지 56년째 아닙니꺼. 이렇게 일찍 매화가 피었던 건 기억에 없습니더.

8일 오후 광양 청매실농원. 양지바른 곳은 이미 매화가 만개했고, 그늘진 비탈은 아직 덜 핀 상태였다.

정말로 그랬다. 8일 오후 3시. 오후 햇살 받은 청매실농원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10만 그루나 된다는 매실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만개한 녀석도 있었고, 꽃망울 머금은 녀석도 있었다. 명인은 “양지바른 곳은 다 피었고 그늘진 비탈은 덜 피었다”며 “주말이면 완전히 필 것 같고 15일이 지나면 질 것 같다”고 말했다.
 
매화가 왜 이렇게 빨리 피었을까요.

추워야 겨울인데 하나도 안 추웠어예. 추워야 벌겡이가 얼어 죽는데. 이 벌겡이들, 우예야 좋노. 우리나라가 제일 좋은 게 사계절 아닙니꺼.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래야 맞지에. 겨울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겠심더. 옛날엔 말입니더. ‘보리누름이면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했어에. 보리가 누레지면 꽤 봄이 됐을 때입니더. 그때도 춥다는 얘기잖아예. 지금은 안 맞아예. 하나도 안 추워예.  

 
어쩌다 날씨가 변했을까요.

건방진 얘기 좀 할게예. 인간이 너무 잘 먹습니더. 너무 편하고예. 그렇게 잘 먹고 편하게 살려고 세상을 오염되게 만들었습니더. 이름 모를 병이 와 이리 많노? 그거 다 인간이 만든 거 아닙니꺼.  

 
꽃이 빨리 피면 좋은 것 아닌가요.

꽃이 빨리 피면 열매도 빨리 열려예. 열매가 빨리 익으면 수확이 빨라져예. 6월 6일 현충일이 매실 환갑입니더. 그때부터 매실을 따야 한다는 말씀입니더. 이렇게 꽃이 피다 보면 1주일은 수확이 빨라질 것 같아예. 설익은 매실엔 몸에 안 좋은 성분이 있어예. 매실만 씨에 독이 있는 게 아닙니더. 모든 과일이 씨에 독이 있어예. 당연하지예. 제 새끼 지켜야 하니께. 과일이 푹 익으면 그런 거 없어예. 다 때가 있는 거라예. 매실을 언제 따야 하나, 벌써 고민입니더.

 
올해도 매화 축제는 취소됐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많네요.

아이고, 말도 마세예. 작년에도 축제 안 했잖아요. 그래도 올 사람은 다 왔어예. 단체 버스는 없었어예. 죄 가족이랑 애인이랑 끼리끼리 왔어예. 그래도 여기가 꽉 찼어예. 작년 매화가 절정일 땐 사람들이 떠밀려서 다녔어예. 오늘이 사람이 많다고예? 택도 없심더. 아직 멀었어예. 주말엔 좀 있을라나 모르겠다.

올해도 광양 매화 축제는 취소됐다. 그러나 출입을 막지는 않았다. 단체 입장객은 없었으나 삼삼오오 끼리끼리 찾아온 관광객이 온종일 이어졌다.

홍쌍리 여사는 1997년 명인으로 선정됐고, 이듬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로 수많은 언론 매체에서 그의 매실 인생을 다뤘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깐 농원을 거니는 동안, 마스크로 무장한 관광객 수십 명이 사진 찍자고 몰려들었다. “농사꾼치고 인기가 좀 있지요?” 명인이 웃어 보였다.


코로나 시대엔 사람이 안 모여야 좋은 것 아닌가요.    

제 바람은 이렇습니더. 겨우내 마음에 찌꺼기 쌓였던 거, 저 섬진강에 다 버리시라. 꽃같이 활짝 웃고, 아름다운 꽃 향 가슴 가득히 보듬고 가시라. 이게 제 바람입니더. 여기가 45만 평(약 1.5㎢)입니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에서 한껏 숨쉬고 가는 게 뭐가 나쁩니꺼.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습니더. 아시잖아예. 입장료 없잖아예. 그냥 오셔서 꽃 보고 가시면 됩니더.

 
그 옛날 이 산비탈에 왜 매실나무를 심었습니까.

사람이 보고 싶어서예. 스물세 살에 시집와서 보니 이 산골짜기에 아무도 없었어예. 스물네 살부터 이 비탈에 매실나무를 심었어예. 5년이면 꽃이 피겠지, 10년이면 소득이 있겠지, 20년이면 사람이 오겠지…. 이렇게 하루하루 살았더니 여기까지 왔어예.

8일 오후 촬영한 광양 청매실농원의 매화.

홍쌍리 여사는 부산 여자다. 온종일 사람 넘쳐났던 국제시장에서 자랐다. 1965년 섬진강변으로 시집와 이듬해 매실 농사를 시작했다. 1994년 청매실농원을 설립했고, 이듬해부터 매화 축제를 열었다. 해마다 3월 하순이면, 그가 “내 딸”이라 부르는 매화 보러 100만 명이 농원을 찾아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매화 축제는 열리지 않는다. 그래도 개별 출입을 막지는 않았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8일 오후 광양시청 사람들이 농원 입구 도로에 나와 교통정리를 해주고 있었다. 봄이 오니 꽃피듯이, 매화 피니 알아서 사람이 찾아온다. 꽃이 축제다. 
 
광양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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