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승 전승, 서른일곱 살 원성진 9단이 쏘아올린 ‘작은 기적’

중앙일보

입력 2021.03.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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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프로기사 원성진 9단. ‘2020-2021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정규리그에서 14승 전승을 기록했다. 20대 초반이 장악한 바둑계에서 서른일곱 살 원성진 9단의 분전은 바둑계에서 ‘작은 기적’으로 불린다. [사진 한국기원]

우리 나이로 그는 서른일곱 살이다. 1985년 7월 15일생이니까 2021년 3월 3일 현재 35년 8개월 가까이 살았다. 젊은 나이는 아니나 늙은 나이도 아니다. 하나 그가 일하는 분야에선 ‘한물갔다’는 말을 듣는 나이다. 그가 경쟁하는 상대가 20대 초반 청년들이어서다. 
 
프로기사 원성진 9단. 그가 지난 주 끝난 ‘2020-2021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정규리그에서 14승 전승을 기록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소속팀 셀트리온도 정규리그에서 우승했다. 바둑리그가 더블리그 시스템을 갖춘 2006년 이후 정규리그 전승을 거둔 기사는 앞서 딱 한 명 있었다. 지난 시즌 전승을 기록한 신진서 9단이다.  
 
관전 레저로서 바둑은 천재들의 향연이다. 요즘 바둑은 젊은 천재들의 각축장이다. 현재 세계대회를 주름잡는 소위 ‘초일류 기사’는 갓 스무 살 넘은 청춘들이다. 당대 1위 신진서 9단이 2000년생이고, 신진서와 세계 최강을 다투는 중국의 커제 9단이 1997년생이고, 지난달 커제를 꺾고 LG배 세계기왕전을 거머쥔 신민준 9단이 1999년생이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프로기사는 모두 378명이다. 이들 중에는 2007년생 기사도 두 명(최민서, 김은지)이나 있다. 원성진 9단과 스물두 살 차이다. 

‘2020-2021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정규리그에서 원성진 9단이 이동훈 9단과 대국하는 장면. 당시 랭킹 18위였던 원성진 9단이 5위 이동훈 9단을 꺾었다. 원성진(1985년생) 9단과 이동훈(1998년생) 9단은 열세 살 차이가 난다. [사진 한국기원]

2020-2021 시즌이 개막했던 지난해 11월. 원성진 9단 랭킹은 18위였다. 당시 기준으로 그는 상위 랭커를 모두 일곱 번 이겼다. 이동훈(5위), 강동윤(6위), 나현(11위), 박승화(16위), 박진솔(17위). 강동윤 9단과 박진솔 9단은 두 번 내리 이겼다. 물론 그보다 모두 어리다. 시즌이 끝나자 원성진 9단 랭킹은 9위까지 올랐다. 대국료도 4840만원이나 벌었다. 바둑리그는 승패에 따라 대국료를 차등 지급한다. 최대 290만원까지 차이가 난다(장고 대국 기준).
 
원성진 9단은 1998년 1월 입단했다. 올해로 24년 차 프로기사다. 전성기는 10년쯤 전이라 할 수 있다. 2011년 삼성화재배를 우승했고, 2013년 LG배 세계기왕전을 준우승했다. 마지막으로 국내 대회 결승에 올랐던 건,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에서 준우승한 2016년이었다. 최근 2년은 바둑리그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2018-2019 시즌에선 8승 6패를 기록했고, 2019-2020 시즌에선 반타작도 못했다(7승 9패).  


이제 내리막에 접어들었나 싶었는데, 대기록을 세웠다. 다승왕도 아니고 전승왕이라니. 바둑계에선 그의 14전 전승을 ‘작은 기적’이라 부른다. 그의 기록이 대단한 건, 21세기 바둑은 인공지능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현대 바둑에서 인공지능은 스승이고, 교과서고, 정답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어린 기사 성적이 좋아진다. 나이가 어리면 인공지능 적응이 빨라서다. 하나 원성진 9단은 아날로그와 더 가깝다. 인터뷰에서도 “인공지능 바둑은 잘 안 둔다”고 답한 적이 있다. 
 
“이전에는 잘못 두면 후회가 앞섰지만, 요즘에는 잘못 두더라도 믿음을 갖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마음가짐을 달리 한 것이 연승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원성진 9단이 밝힌 전승 신화의 원동력이다. 나이 먹었다고 무시당하는 세상, 한물갔다는 소릴 듣던 중견 기사는 한참 어린 상대들을 다 쓰러뜨린 뒤 자신을 믿었다고 말했다. 디지털 세상도 마음 먹기 나름이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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