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참사 겪고도 똑같다" 선거 한탕만 노리는 野 고질병

중앙일보

입력 2020.12.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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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받는 보수정당] ④인재고립

 
요즘 정치권에선 단연 윤석열 검찰총장이 화두입니다. 여론조사에 따라 차기 대선후보 1위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1위가 아니더라도, 어느 여론조사를 막론하고 야권 잠룡들 중엔 가장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윤석열의 부상’은 누가 봐도 문재인 정부의 위기입니다. 그렇지만 제1야당 국민의힘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현 정부에서 임명된 검찰총장이 야당의 존재를 지우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지지율은 떨어지는데, 국민의힘 지지율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3일 전국 18세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20%로 그 전주보다 2%포인트 낮아졌습니다.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총선 패배 후 지금까지 국민의힘 지지율은 20% 박스권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수 성향 유권자들조차 국민의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응답자 가운데 스스로 보수 성향이라고 응답한 이들(22.8%) 중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한다는 이들은 43%로 과반에 못 미쳤습니다. 한 마디로 ‘윤석열을 택할지언정, 국민의힘은 아니다’란 겁니다. 왜 이렇게 보수야당의 존재감이 희미해진 것일까요. 건전한 정당 정치를 위해선 능력있는 제1야당의 재건이 필수적입니다.
 
중앙일보는 보수야당이 처한 현실을 ①가치상실 ②세대고립 ③지역고립 ④인재고립 ⑤계급고립의 5개 분야로 나눠 하나씩 짚어봅니다. 이번은 4회 ‘인재고립’ 편입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8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공수처법 개정안 강행처리를 비판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매번 되풀이 되던 청년팔이 만행이 벌어졌고, 그 꼬임에 속아 청년들은 티슈처럼 쓰고 버려졌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에서 각각 중앙미래세대위원장과 서울시당 청년위원장 등을 지낸 김성용(34) 전 송파병 당협위원장은 지난 3월 15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2019년 당 역사상 처음 열린 조직위원장 공개오디션에서 우승해 송파병 당협위원장이 됐고, 총선 전까지 1년 넘게 지역구를 닦았다. 그러나 총선은 뛰지도 못했다. 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이곳에 혁신통합추진위원으로 활동했던 김근식 경남대 교수를 공천했다. 김 전 위원장은 “연줄·빽·학벌·직업만 보고 공천할 거면 도대체 당협위원장의 존재 의미는 뭔가. 이 상황에서 어떤 청년이 당에 들어오고 싶겠는가”라고 항변했다.


같은 날 김용태(30) 국민의힘 경기 광명을 당협위원장은 월셋집을 계약했다. 광명에 공천을 받았지만, 연고도 지낼 곳도 없어 급하게 집을 구한 것이다. 그는 2017년 바른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뒤 계속 서울 송파을에서 선거를 준비했고 총선 예비후보 등록도 이곳에 했지만 결국 출마한 곳은 당이 정한 ‘청년 벨트’ 중 한 곳인 광명을이었다. 송파을에는 2018년 자유한국당이 영입한 배현진 의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의 결정을 이해했지만, 아무 인연도 아는 사람도 없는 지역에서 갑자기 선거를 뛰라고 했을 땐 참 막막했다”고 말했다.
 
선거 때마다 국민의힘을 휩쓰는 ‘인재 영입 폭풍’의 한 단면이다. 각계 저명인사가 물망에 오르고, 일부는 화제를 모으며 당에 들어온다. 당에서 활동하던 인사는 “참신하지 않다”며 공천과 더 멀어진다. 그리고 다음 선거가 다가오면 “인물이 없다”며 다시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김성용 전 위원장은 “인재를 배출해 낼 역량이 없는 정당이라는 걸 스스로 보여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탄핵’ 후 주저앉은 보수정당 지지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2022년 대선을 앞두고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당에선 “후보가 안 보인다”(10월 16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고 하고, 그 사이 당 바깥 인사들이 ‘유력 야권 주자’ 타이틀을 꿰차고 있다.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비(非)여권 주자 중 두 자릿수 지지율을 기록하는 유일한 인물이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공공연히 ‘윤석열 대망론’이 거론된다.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나 민주당을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의 이름이 꾸준히 오르내린다. 제1야당 내부보다, 여권과 대척점에 있던 외부 인사들의 존재감이 더 두드러진지 오래다.
 
“후보가 안 보인다”고 한 김 위원장도 역시 외부인사다. 총선 참패후 사태를 수습하고 당 개혁을 이끌 사람이 없다며 김 위원장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총선 때까지 운전대를 잡은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역시 당 밖에 있을 때 보수진영 대선 주자로 떠올랐다. 대표가 되기 두 달 전까지는 당에 몸담은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당에서 배우고 성장한 인재는 안 보이고, 선거 때마다 외부 인사에 기대니 당에 인물이 있겠나. 국민의힘의 고질병”이라고 지적한다. 정치학자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사람들을 수혈하다 보니 정당 자립성은 사라지고, 뽑힌 사람은 존재감을 드러내려 격렬한 정치를 하게 돼 정치도 나빠진다”며 “공직 후보자를 양성하지 못하면 선거 기획사지 정당인가. 내부 장기를 건강하게 해 튼튼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데 국민의힘은 매번 장기를 교체하니 몸이 좋아질 수 없다”고 분석했다.
 

“반기문 사태에도 배운 게 없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퇴임 후인 2017년 1월 1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당시 '반기문 대망론'이 절정에 달했지만, 반 전 총장은 입국한지 한달도 채 안돼 불출마를 선언했다. 중앙포토



당 밖에선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사태를 겪으면서도 아무 교훈을 못 얻은 것 같다”는 지적도 많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윤 총장을 마치 야권 대선 주자처럼 여기며 정권 탈환을 꿈꾸는데, 역설적으로 국민의힘의 인물난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오랜 시간 당을 이끌 수 있는 제대로 된 리더십은 단기간에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2017년 당과 별 인연도 없던 반 전 총장을 서포트하겠다며 당내 핵심인사부터 실무진까지 앞다퉈 줄을 섰던 게 생생하다”며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반 전 총장은 떠났고, 당은 대참사를 겪었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회상했다. 황 전 대표의 등장 때도 비슷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당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다. 그러나 입당과 동시에 ‘친황’이라는 계파가 형성됐다.
 
박상헌 정치평론가는 “단기적인 선거 이익만 따지다 보니 지속가능한 정당이 되려는 노력을 안 한다”며 “두산 베어스가 꾸준히 강팀인 이유는 좋은 전력과 시설을 갖춘 2군에서 인재가 배출되기 때문인데, 국민의힘은 인재 육성 시스템 없이 스타만 데려오는 팀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인다”고 평가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문총장이 2017년 2월 1일 국회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국회를 떠나는 모습. 중앙포토

 

거물 수혈에 내팽개쳐진 인재 육성

 

바깥의 거물을 수혈하는 ‘정치적 한탕주의’에 빠져있다가 보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인재를 키우는 데는 소홀했다. 당내 청년들이 “선거만 되면 유명인을 모셔와 좋은 지역구를 나눠 주고, 당에서 헌신한 사람은 인지도가 없다며 험지로 보내 고사 시킨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이유다.
 

253곳 지역구 중 ‘보수 청년’은 5명 뿐.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지난 총선에서도 통합당은 경기 수원정 등 수도권 8곳을 ‘청년 벨트’로 지정하고, 45세 미만 청년 16명을 ‘퓨처 메이커’(future maker)로 지칭하며 이곳에서 경쟁하도록 했다. 그러나 8곳 모두 당선 확률이 극히 낮은 험지였고, 실제 전부 패했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회가 다변화하며 정당도 큰 담론보단 다양한 이익을 대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데, 국민의힘은 그 해결방법으로 외부 인재 영입을 택해왔다”며 “문제는 그들이 일회성으로 이용되고 그친다는 점이다. 당에 들어와 주류에 묻혀버리고 내쳐진다”고 비판했다.
 
영국이나 독일 등에선 ‘청년 보수당’이나 ‘영 유니언(young union)’ 같은 조직이 인재를 육성한다. 일본의 경우 정당에 속한 건 아니지만,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이란 정치 인재 육성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길러진 정치인들이 정계로 대거 진출하기도 했다. 이곳 출신들은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15명이 한 번에 당선되며 큰 주목을 받았고,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를 배출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명시적인 인재 육성 시스템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총학생회를 비롯한 운동권 조직이 사실상 교육과 후진 양성 역할을 담당했다. 의원과 보좌진 관계도 고용과 피고용인 관계라기보다 ‘동지’의 성격이 짙어 자연스레 후진 양성이 이뤄지는 측면도 있다.
 
엄경영 시대전신연구소장은 “민주당은 보좌관이나 비서로 정치를 시작해 중진의원이나 국무총리, 장관 등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지만, 국민의힘은 의원과 보좌진이 주종관계에 가까워 당 실무자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할만한 환경이 아니다”며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 속에서 당의 젊은 인사를 무시하니 선거 때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외부 수혈에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한 의원이 지난 3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열린 임시회 본회의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전신)의 퓨처 메이커 후보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실제 2018년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ㆍ보궐선거에선 민주당보좌관협의회(민보협) 출신 36명이 기초단체장과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당시 선거 이후 한 토론회에서 “진보좌파는 정치에 관심 있는 후배들을 육성해 왔는데 우리는 세대교체를 위한 충원구조를 충실하게 구축하지 못했다. 우리의 취약한 구조가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재풀 찾아야 할 여연, 해체 거론될 만큼 쇠퇴

인재 충원 방식과 관련해 여의도연구원(여연) 개혁도 거론된다. 과거엔 정치 신인이지만 여연을 거치며 훈련 받은 이들이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었지만 정치는 처음이었던 40대 초반의 유승민 전 의원이 당에 들어온 2000년부터 3년 넘게 여연(당시 여의도연구소)에 있으며 역량을 키웠다.
 
그러나 최근까지 여연의 역할과 위상은 급격하게 축소돼왔다. 4ㆍ15 총선 직후에는 주호영 원내대표가 먼저 “여연을 제대로 개혁하려면 아예 해체하고 새로운 연구 법인을 세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여의도연구원 로고. 중앙포토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과 보수진영 연구단체, 학계, 민간 전문가 등을 연결해야 하는 고리가 여연이라 인재풀 양성에서도 허브가 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여연을 강화하고 진짜 싱크탱크가 될 인재들도 많이 양성해야 수권정당의 면모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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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어젠다까지 흡수하며 장기집권한 독일 기민당
독일에서 유학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보수정당이 가야할 길을 독일의 기독민주당(기민당)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자신의 저서『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는 “보수정당이지만 스스로 보수를 앞세우지 않으면서 보수주의를 실천하고 좌파의 어젠다까지 선점했다”고 적었다.
 
기민당은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끌던 시절 1983년부터 1998년까지 16년 동안 장기집권했다. 이후 7년간 정권을 내줬지만, 다시 정권을 찾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15년째 집권 중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독일 역대 최장수 총리 1ㆍ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기민당은 중도보수 정당이지만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인식하고 정책 수정을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연성을 중요 무기로 삼은 메르켈 총리는 집권 기간 동안 원전 폐쇄, 복지 확대, 동성애, 증세, 최저임금 문제 등에 있어 진보 정당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주요 가치들까지 과감히 흡수했다. 또 재무ㆍ외교 등 주요 8개 부처의 장관 자리를 사민당에 주며 대연정을 통한 개혁을 추진했다. 김 위원장이 저서에서 “좌파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고 설명한 이유다.
 
한영익ㆍ윤정민ㆍ정진우 기자, 김수현 인턴기자 yunj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