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은 전시실 입구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낯선 흑백 영상으로 시작한다. 을씨년스러운 제주의 바람과 파도, 쉼없이 거미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소나무숲 등이 병렬 스크린에 나눠 투사된다. 관객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며 남긴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만나기에 앞서 그가 느꼈을 유배지의 고독과 자연 교감을 이 7분간 간접 경험한다.
‘세한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이 영상물을 제작한 이는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36). 지난 8월 박물관 측 의뢰를 받고 9월 중순 입국, 2주 자가격리를 마친 후 제주도에서 2주간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만들었다. 2013년부터 5년간 국민대 영상디자인학과 애니메이션 조교수를 해서 한국 생활은 익숙하지만 한국 문인화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세한도’는 이름만 들어본 상태였다. 영어로 된 논문을 읽으며 김정희라는 인물을 알아갔고 한라산 성판악에서부터 관음사까지 두차례 오르내리며 체험·관찰한 자연 위주로 영상을 엮었다. 추사 유배지를 재현한 서귀포시 대정의 추사적거지는 “너무 현대적 분위기라서” 소품 일부만 활용했다.
“세한도는 유배당한 지식인이 9년 가까이 불행을 버티면서 옛날 제자가 보내준 책을 받고 감사를 표한 그림이잖아요. 본인은 이게 위대한 작품이 될지 몰랐을 것 같아요. 그런데 중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그걸 감상문으로 남겨서 14m 넘는 길이가 됐죠. 무얼 봤기에 그랬을까, 그 느낌을 살리려 했어요.”
제주 촬영 전에 자신이 거주하는 프랑스 보르도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임시로 찍어봤다고 했다. “세한도에 그려진 것 같은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단다. 작은 무인도에도 들어가 봤다. “현대 문명과 단절되니 몇 세기 전과 오늘날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세한도에 많은 감정이 있겠지만 외로움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요. 요즘 우리도 코로나19 때문에 외로운 도시에 살고 있는 상황이라서 더 크게 와 닿았어요.”
중앙박물관 특별전 도입부 7분 영상 제작
2주 자가격리 후 제주 스산한 풍경 담아
"14m 이르는 감상문, 요즘 SNS 댓글 같아"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사실 한국의 국보 앞에 영상을 놓게 되니 제가 잘 이해한 건지 걱정스러웠어요. 우리도 요즘 유튜브 볼 때 다른 사람 댓글 보는 걸 즐기잖아요. 세한도의 감상문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 의견 궁금해하는 건 비슷하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아무리 세계적인 작품이라도, 예컨대 에밀 졸라 소설이라 해도 배경 지식이 없으면 왜 그렇게 위대한지 공감할 수 없잖아요. 세한도 역시 작품에 맞물린 편지와 다른 스토리들, 그리고 역사적으로 파괴될 위험도 있었는데 가까스로 보존된 것 등이 맞물려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