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제52차 한ㆍ미안보협의회의(SCM) 발표문에서 매년 포함했던 ‘주한미군 병력 유지’ 언급이 빠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병력을 줄이거나 철수하려는 신호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회의 모두발언에서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방위비 인상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어 예정됐던 양국 국방장관의 공동 기자회견이 돌연 취소되는 등 한·미가 삐걱거리는 조짐도 나타나며 우려를 키웠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지난달 26일 국정감사에서 “미국 정부가 해외 주둔 미군 병력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해외 주둔 미군을 붙박이로 한 나라에 두는 대신 전략적 상황에 따라 조정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용한 배틀그라운드]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군 병력을 감축할 가능성은 열어 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지난 6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독일에서 만명이 넘는 병력을 빼냈다. 주둔 비용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이유도 들었는데, 심지어 “독일만 그런 것이 아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주둔 75년, 규모 놓고 논란 이어져
1960년대 6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병력은 1971년 미 육군 7사단이 철수하면서 4만 3000명으로 줄었다.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당선돼 1977년 취임했고, 2년 뒤 박정희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병력 감축을 주장했다.
카터 대통령은 ‘북한은 GDP 대비 20% 예산을 군사비에 투자하는데 한국은 5%를 쓰고 있다’며 설전을 벌였지만 결국 철군 계획은 거둬들였다. 이후 병력이 감축된 건 냉전이 종식된 1992년이었다. 주한미군은 15% 줄인 3만 6500명으로 조정됐다.
주한미군 빼 이라크 전쟁 투입
GDPR의 ‘전략적 유연성’은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역동적인 전력전개(DFE)’ 개념으로 정책 기조가 이어진다. ‘전략적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순환 배치와 신속 배치를 강조하면서 이번 SCM에서 주한미군 병력 언급이 빠졌다는 설명이다.
이런 개념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의 병력과 장비를 필요하면 한반도 이외 지역으로 이동하길 원한다. 이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에게 적용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미국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지상군 전투 부대인 주한미군을 한반도 방위뿐만 아니라 인도·태평양 지역의 소방수로 활용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지난 7월 17일 미 육군전쟁대학(AWC) 부설 전략문제연구소(SSI)가 펴낸 보고서에서도 병력 재배치 필요성이 지적된 적이 있다.
보고서는 “하와이를 제외한 지역의 미군은 중국의 재래식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등의 사정권 안에 있다”며 “소수 기지에 미군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비용 측면에선 효율적이겠지만 전략적으론 무책임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배경에서 “더 넓게 분산된 배치가 더 지속적이고 탄력적이며 해외작전 수행 능력에서 도움이 된다”고 권고했다.
트럼프 견제 나선 미 의회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선 건 미 의회다. 미 상원과 하원은 지난 7월 ‘2021 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주한미군 병력을 현 수준(2만8000명) 이하로 감축하기 어려운 조건을 걸어놨다.
이는 주한미군 규모와 관련해 미국 내 여론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대체로 당장은 주한미군 철수나 병력 감축이 이뤄지기 어렵다고 전망한다. 미 의회 등 정치권에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정한범 국방대학교 교수는 “미국 내에서 ‘주한미군 병력이 줄어들면 중국만 좋은 일’이라는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고 전했다.
"트럼프 재집권 시 공세 예상"
게다가 한국에선 이미 2004년 한·미 합의 이후 한반도에 흩어져 있던 주한미군 병력을 평택 미군 기지로 통합하며 효율성을 높였다. 험프리스 평택 기지엔 주한미군 병력 70%가 주둔하며 주한미군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도 서울 용산에서 옮겨왔다. 한·미연합사령부도 조만간 이전할 계획이다.
험프리스는 해외 주둔 미군 기지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평가된다. 전체 면적은 430만 평으로, 여의도 5.5배ㆍ판교 신도시 1.6배 수준으로 최대 4만 5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 정부는 기지 조성과 이전 비용의 94%(18조 원)를 부담했다.
향후 변수는 미국 대선이다. 류제승 부원장은 “트럼프가 집권하면 병력 감축을 비롯한 정책이 미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판단하고 보다 '거래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선거 결과에 따른 미국 내 동향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신범철 센터장은 “국방수권법이 있더라도 다른 국방 예산에서 비용을 끌어오는 ‘전용’이 가능해 주한미군 축소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고 했다. 또한, 수권법은 매년 갱신해야 효력을 유지할 수 있다.
박용한 기자 park.yongh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