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1942~2020
현명관 전 비서실장이 본 이 회장
“사고 싶은 물건이니 당연” 통 큰 모습
“질로 승부” 지시 “양도 중요” 의견에
신경영선언 전날 포크 던지며 격노
◆ 신경영 선언 하루 전날 무슨 일이= 1993년 6월 6일, 삼성의 사장단 100여 명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모였다. ‘신경영 선언’ 하루 전날이었다. 호텔 회의장엔 녹음된 이 회장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회장은 지시가 경영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는 일이 반복되자 직접 녹음해 전달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시간이 걸려도 질로 승부해야 합니다. 당장 매출이 줄어도 할 수 없어. 도전해야 해.” 그런데 직후, 이수빈 당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 양적 성장을 통해 흑자를 만들고 질로 나아갈 바탕을 만들어야….” 그 순간 회의장엔 ‘탕!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회장이 테이블에 있던 포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소리였다. 현 전 회장은 “비서실장은 사장단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신 전달한 것인데 이 회장이 격노했다”며 “당시 사장단조차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승지원에서의 항명, 그리고 반전=승지원은 회장의 집무실이자 삼성의 영빈관이다. 삼성의 대소사가 대부분 이곳에서 결정됐다. 이런 곳에서 현 전 회장은 삼성시계 사장 시절, 이 회장에게 항명에 가까운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삼성시계는 일본의 초정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세이코와 합작한 회사다. 이 회장이 설립을 주도했고, 직접 챙기던 곳이다. 이런 회사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당시 분위기에선 ‘불경’이었다.
하지만 현 전 회장은 “세이코가 기술이전도 제대로 안 해주면서 불공정한 거래를 요구한다”며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역린’을 건드렸다고 느꼈을 때, 이 회장은 “누가 (해결)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있었어?”라며 현 전 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현 전 회장은 “이 회장의 리더십은 기분에 따라 불호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항명처럼 보이는 말도 귀담아듣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