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뇌전증은 ‘예측 불가의 병’으로 통한다. 유전·외상, 뇌 질환 등 원인이 다양해 예방이 어렵다. 언제, 어디에서 증상이 나타날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손영민(52) 교수는 “평생에 걸쳐 불과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뇌전증 증상 때문에 환자는 수십 년을 우울·불안 속에서 살아간다”며 “치매·뇌졸중 다음으로 흔한 뇌 신경 질환이지만, 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증상을 숨기거나 제때 발견하지 못해 병을 키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진화하는 뇌 심부 자극술
뇌의 신경세포는 서로 전기신호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환한다. 이런 전기신호가 비정상적으로 증폭하면 뇌에 과부하가 걸려 언어·행동·감각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질환을 뇌전증이라 한다. 전기 충격을 받은 듯 거품을 물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은 뇌전증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뇌전증에 ‘난치병’이란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다.
하지만 뇌전증은 예측이 어려울 뿐 충분히 관리 가능한 질환이다. 실제로 뇌전증 환자의 약 70%는 항경련제 등 약물만으로 발작이 통제된다. 고혈압·당뇨병처럼 약만 잘 먹으면 별다른 증상 없이 운전·업무·학업 등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약으로는 치료가 잘 안 되는 30%의 ‘난치성 뇌전증’도 수술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존재한다. ‘뇌 심부 자극술’이 대표적이다. 대뇌에 가는 백금선(전극)을 삽입한 뒤 약한 전기 자극을 가해 흥분된 뇌를 가라앉히는 치료법이다.
황성희(가명)씨는 40대 중반에 갑작스럽게 뇌전증이 발병했다. 약을 먹어도 발작이 조절되지 않아 생업마저 포기해야 했다. 그러던 중 손 교수를 만나 2007년 뇌 심부 자극술을 받았고, 10년 넘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그것도 떨림 등 경미한 증상만 나타날 뿐이다. 지금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손 교수는 “그동안 뇌 심부 자극술을 받은 뇌전증 환자 29명을 최대 11년간 장기 추적한 연구(유럽 뇌전증학회지, 2017)에서 환자의 발작 빈도는 평균 7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수많은 환자가 뇌 심부 자극술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뇌 심부 자극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백금선의 직경은 1㎜ 정도로 다른 뇌 부위 손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슴 부위에 이식하는 전기 자극 발생기는 무선 충전이 가능해 15년 이상 장기 사용할 수 있다. 무게도 달걀만큼 가벼워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다.
수술 방식도 보다 정교해지고 있다. 종전에는 부작용이 심한 ‘시상하부’ ‘소뇌’ 등에 백금선을 꼽았지만, 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지금은 ‘전시상핵’ ‘해마’처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전기신호를 컨트롤할 수 있는 부위를 치료 대상으로 삼는다.
자주 넋 놓거나 입 쩝쩝거리면 의심
최근 손 교수는 전시상핵을 세분해, 특히 전방 부위에 백금선을 삽입할 경우 발작 감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보고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뇌전증은 뇌 심부 자극술을 포함해 약물, 뇌 절제술 등 다양한 치료법으로 ‘맞춤 관리’가 가능한 한 거의 유일한 뇌 신경 질환”이라며 “병에 대한 두려움에 치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관건은 뇌전증의 신호를 알아채는 일이다. 대개 뇌전증이라면 경련과 함께 쓰러지거나 입에 거품을 무는 대발작만을 생각한다. 그런데 성인의 경우 대발작보다는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거나 동일한 행동을 1~2분 반복하는 소발작(자동증)이 훨씬 많다는 게 손 교수의 설명이다. 이런 소발작 증상은 다른 뇌 질환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뇌전증만의 고유한 증상이다.
뇌전증을 제때 관리하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나 무산소성 뇌 손상으로 치명적인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손 교수는 “뇌전증의 환자 분포는 소아·고령에 집중되는 ‘U자 곡선’을 그린다”며 “60대 이후로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쩝쩝 다시거나 주변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등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면 병원을 찾아 뇌전증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