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멈춰선 꿈, 美 48개주 혈액·마스크 수송 도전했죠”

중앙일보

입력 2020.10.06 13:27

수정 2020.10.0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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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혈액 수송을 진행한 이동진, 윤지우 파일럿. [사진 이동진]

“그토록 꿈꿔온 파일럿이 됐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코로나19로 항공사들이 파산하기 시작했고 지난 4년간 받은 비행 교육과 훈련이 헛수고가 될까 두려웠죠.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미국에 남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에인절 플라이트’를 알게 됐어요.”
 
올 초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조종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비행시간을 채우고 항공사 취업을 준비하던 이동진(32)씨는 그렇게 미국 48개 주 의료물품 비행수송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 수송을 제공하는 비영리단체라면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산타모니카에 있는 에인절 플라이트 웨스트를 찾았다.

『당신은 도전자입니까』 저자 이동진
히말라야·아마존 이어 미 하늘길 도전
윤지우씨와 1마일당 1달러 기부 나서
“의료진 아니어도 재능 활용법 많아”

대학 재학 시절 히말라야 5800m 등정을 시작으로 울진-독도 240㎞ 릴레이 수영, 아마존 정글 마라톤 222㎞, 미국 6000㎞ 자전거 횡단, 몽골 2500㎞ 승마 횡단 등 도전자 DNA로 똘똘 뭉친 경험을 담은 에세이 『당신은 도전자입니까』(2014)를 출간하기도 했던 그는 경비행기로 가기 힘든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제외하고 48개 주 8718마일(1만4030㎞)을 비행할 계획을 세웠다. 자원봉사지만 직접 부담해야 할 대여료와 체류비 등을 계산하면 족히 5000만~6000만원은 필요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항공사 채용 중단…희망 전달 방법 찾아”

에인절 플라이트 웨스트 SNS에 올라온 이동진, 윤지우 파일럿 소식. [트위터 캡처]

지난달 30일 화상으로 만난 그는 “여러 사람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수중에 가지고 있던 1500만원을 탈탈 털자 텐마인즈 장승웅 대표, 파파레서피 김한균 대표, 채널PNF 고은우 대표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된 지인들이 힘을 보탰다. 펀딩사이트 고펀드미를 통해 1마일당 1달러를 모금해 8718달러(약 1000만원)를 에인절 플라이트에 기부하는 프로젝트도 병행했다.  

 
이씨는 “의료진이 아니어도 코로나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미국에 있는 68만명의 파일럿에게 의료 수송 참여를 독려하고 희망을 전달하는 동시에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한 방법을 찾을 수 있길 바랐다”고 밝혔다. 2018년 교관으로 만나 현재는 미국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윤지우(26)씨도 동참했다. 경비행기는 기상 상황 등 변수가 많기 때문에 베테랑 파일럿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비행으로 생명 구할 수 있다니 감동”

9월 미국 인디애나에서 펜실베이니아로 마스크 수송을 하는 모습. [사진 이동진]

비행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8월 9~20일 서부와 중부 22개 주, 9월 14~27일 동부 26개 주를 돌았다. 1차 비행에서는 캘리포니아 유카밸리와 산타아나에서 샌버너디노로 혈액을 수송하고, 2차 비행에서는 인디애나에서 펜실베이니아로 마스크 수송을 진행했다. 이씨는 “우리가 전달하는 혈액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면서도 감동적이었다”며 “스케줄이 맞지 않아 더 많은 수송에 참여하지 못해 아쉽다”고 밝혔다.  
 
화상 인터뷰에 함께 한 윤씨는 “그동안 빨리 자격증을 따고 취업해 돈을 벌면서 순전히 나를 위한 비행을 했다면, 이번엔 오롯이 남을 위한 비행을 한 기분”이라며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양한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춥고 덥고 건조하고 습하고 온갖 기후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1달을 1년처럼 산 것 같아요. GPS 결함 등 힘든 일도 많았지만 덕분에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었어요.”(윤)

 

“불가능해보이는 꿈도 언젠간 이뤄져”

이동진씨의 미국 비행학교 시절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이엠어파일럿’. [사진 마션브라더스]

3일 귀국한 이씨는 다큐멘터리 ‘아이엠어파일럿’ 배급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학비가 없어 미국 비행학교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 홍보하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받은 그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초청받기도 했다. 몽골 횡단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고삐’(2015)를 제작하며 영화사 마션브라더스를 차린 그는 “아무도 제 영화를 만들어주지 않아서 시작했는데 도전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재미있다”며 “극장 상영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세 번째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원래는 미국 50개 주를 돌면서 50명의 아이를 태우고 싶은 꿈이 있었거든요. 비행기를 타기 힘든 아이들에게 하늘 구경도 시켜주고 꿈도 심어주는 거죠. 제가 시력이 좋지 않아 파일럿을 포기했었는데 안경 등 교정시력이 인정되면서 돌고 돌아 꿈을 이루게 된 것처럼 언젠가 그 경험이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작은 항공사를 만들고 싶은 꿈도 있어요. 6~10인용 비행기로 맞춤형 여행을 제공하는 거죠. 지금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꿈을 꾸다 보면, 조금씩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결국 이뤄지더라고요.”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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