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두 놈은 너희 동기가 될 자격이 없다. 몽둥이로 때려죽여라.”
1968년 7월 11일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실미도 부대 연병장. 단상에 꼿꼿이 선 이모 소대장이 공작원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밧줄로 꽁꽁 묶여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OO·신OO 공작원을 죽이라는 지시였다. 천막봉을 손에 들고 멈칫대는 공작원들 등에 기간병들의 몽둥이가 내리꽂혔다.
실미도는 점점 죽음의 땅으로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⑧]첫 탈영
감금·가혹행위 길어지자 인내심 바닥나
특히 북파공작을 위해 백령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후부터 공작원들은 기간병들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북파 공작 후 보상을 받아 새 삶을 살겠다는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간병들은 기간병들대로 공작원들의 저항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1970년 8월에는 윤OO 공작원이 박모 기간병을 폭행했고, 기간병들은 공작원들에게 윤 공작원을 몽둥이로 집단 린치를 가해 살해하도록 했다.
공작원 저항에 임의 처형으로 대응
“수영 훈련하다 익사, 유기치사 여지”
“조OO가 힘에 겨워 물속에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김모 소대장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겠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다 물속에서 꼴깍꼴깍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김창구 공작원·1971년 재판 기록)
김 소대장은 이에 대해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와 면담에서 상반된 진술을 했다. “조OO가 20m쯤 떨어진 곳에서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여 ‘괜찮냐’ 하고 물었더니 ‘괜찮습니다’라고 하여 그런 줄 알고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대장님’ 소리가 들렸고, 조OO 쪽을 봤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아 구조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조 공작원의 시신은 화장되지 않고 실미도 남단 야산에 묻혔다. 현재 조 공작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남아 있다. 김 소대장은 “조총을 쏘며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고 주장했다.
백령도 회군 후 실미도 부대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면서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공작원이 죽어 나갔다. 실미도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실미도를 넘어 무의도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강력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 회에서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2006년)와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 기록, 실미도 부대 관련 정부 자료, 유가족·부대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지난 기사 보기〉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
https://www.joongang.co.kr/issue/11272
①50년 전 울린 총성의 진실은?…마침표 못 찍은 ‘실미도’
②시민 탄 버스에서 총격전···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③실미도 부대 만든 그 말…“박정희 목 따러 왔다”
④실미도 31명은 사형수? 수리공·요리사등 평범한 청년이었다
⑤기관총탄이 발뒤꿈치 박혔다, 지옥문이 열렸다
⑥1년 반 동안의 지옥훈련…北 보복위해 백령도 향한 특수부대
⑦"때려죽인뒤 불태웠다" 훈련병의 처참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