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① 편가르기는 죄인가
좋은 질문은 축적된 지식과 깊은 통찰에서 나온다. 수십만 년 전부터 인류는 달과 별이 뜨고 지는 것을 봤지만, 꽤 오랜 후에야 “지구 스스로 돌고 있는 것 아닐까”란 질문을 던졌다. 좋은 질문을 위해선 세밀한 관찰로 문제를 발견하고,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가설을 세워야 한다. 좋은 질문은 사안의 핵심을 파고드는 통찰이며, 인공지능이 따라 할 수 없는 창의적 직관이다. 그렇기에 슬라보이 지제크는 “자판기처럼 해결책을 내놓는 전문가는 많지만, 본질을 탐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
경제·외교안보·미래, 함께 고민을
“괴물 검찰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던 조국(『진보집권플랜』)의 질문도 틀렸다. 바른 질문이라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개혁할 것인지 물어야 했다. 국민을 위한 개혁이라면 대통령의 말대로 “살아 있는 권력에 엄정하도록”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에 한없이 나긋하다. ‘청와대 정부’라는 새로운 ‘괴물’까지 나오고 있다. 평생 검사 얼굴 한 번 볼까 말까 한 일반인을 위해서라면 조두순 같은 흉악범을 막는 ‘범죄와의 전쟁’이나 각종 민생사범을 줄이는 것부터 고민하지 않았을까.
정의·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또한 청년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했다면 ‘공정’만 공허하게 37번이나 외치진 않았을 것이다. 정의가 집권세력이 아닌 국민의 것이었다면, 범죄 피의자에게 ‘마음의 빚’을 표현할 일도 없다. 국민의 안위가 우선이라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생명존중 의지에 경의’(8일 친서) 같은 표현으로 북한 바라기만 했을까.
라파엘로가 묘사한 아테네학당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눈은 미래를 향하며 묻는다. 더 이상 과거로 침잠하는 구시대의 질문을 반복해선 안 된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풀 수 없다”던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새롭고 본질을 향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개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더 나은 성취를 이루고, 노력에 따른 보상이 공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야 한다. 3년 전 ‘이게 나라냐’던 국민의 좌절감이 ‘나라가 네 것이냐’는 분노로 돌아온 이유를 집권세력은 자문해 보라. 누구를 위한 정의와 평등이며, 어떻게 공정할 것인지 평범한 시민들이 묻고 있다.
특별취재팀 = 고정애·김영훈·하현옥·유지혜·권호·박수련·이소아·윤석만·강기헌·하남현 기자 q2020@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