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8일(현지시간) 베이루트 순교자광장에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국민은 정권의 몰락을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떠나라. 당신들은 모두 살인자”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경찰 1명 사망, 시민 100여명 부상
"정권 몰락" 외치며 정부기관 습격
베이루트 폭발 참사에 정부 향한 분노
총리는 조기 총선 제안, 의원들 줄사퇴
트럼프 · 마크롱, 9일 지원 위한 화상회의
일부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총으로 진압했다. 시위대와 경찰 충돌이 격화하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시민 100여 명이 다쳤다. 피투성이가 된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구급차에 실려 갔다.
성난 시위대는 정부기관을 습격하기도 했다. 외교부를 점거한 일부 시민은 미셸 아운 대통령의 초상화를 불태웠다. 또 한 시위자는 “모든 국민에게 정부 부처를 점령할 것을 촉구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반정부 시위는 지난 4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로 촉발됐다. 이번 참사로 지금까지 158명이 숨지고, 6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9일 AFP통신에 따르면 베이루트 대폭발 현장에는 깊이 43m에 달하는 대규모 구덩이가 한 개 생겼다. 폭발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레바논 매체 데일리스타는 앤드루 티아스 영국 셰필드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의 분석을 인용해 베이루트 폭발의 충격파 세기가 일본 히로시마에서 투하된 원자폭탄 충격파의 20~30%에 상응한다고 보도했다.
시위대는 이번 참사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란 점에서 분노하고 있다. 앞서 폭발을 일으킨 질산암모늄 2750t이 베이루트 항만 창고에 6년간 방치돼 있었던 데다 정부 관료들이 이를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단 사실이 드러났다. 이 질산암모늄을 방치한 정치인들이 책임지고 사퇴하고, 과실에 대한 처벌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레바논 내에서 커지고 있다.
가뜩이나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던 레바논에서 폭발 참사까지 일어나면서 국민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풀이된다. 레바논 정국의 혼란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난, 정치적 혼란 겹쳐 민심 이반 … 총리, 조기 총선 제안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은 8일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레바논 국민이 평화 시위를 할 권리를 지지하며 모든 관련자가 폭력을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레바논 국민은 너무 많이 고통받아왔다”며 “이들은 투명성과 책임성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 방향을 바꾸는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전했다.
최근 레바논은 치솟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 통화 가치 폭락 등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1975~1990년 내전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란 평이 나왔다. 이런 와중에 벌어진 폭발 참사로 집을 잃은 이재민 30만 명이 발생했고, 경제적 피해는 150억 달러(약 17조원)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정치적으로는 첨예한 종교 갈등 때문에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나눠 맡고 있다. 종파들끼리 권력을 분점한 점이 오히려 부패와 무책임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또 시아파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가 합법정당으로 의회에 진출하면서 종파 간 대립과 이스라엘과의 갈등이 커졌다.
당분간 정치적인 대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조기 총선을 제안했다. 디아브 총리는 9일 TV 연설에서 “10일 의회 선거를 조기에 치르자고 정부에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마날 압델-사마드 레바논 공보장관은 베이루트 참사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앞서 레바논의 기독교계 정당 카타이브당 소속 의원 3명 등 국회의원 5명도 의원직을 사퇴한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헤즈볼라는 베이루트항 창고에 무기를 보관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헤즈볼라 측은 “우리는 베이루트항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트럼프·마크롱 등 주요국 정상, 지원 위한 화상회의
아운 대통령은 베이루트항 참사 원인과 관련, 외부 공격을 둘러싼 가설도 조사 대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번 폭발의 진상을 신속히 규명하겠다"면서 "폭발 원인은 아직 결론 나지 않았지만, 로켓·폭탄, 다른 행위 등 외부 공격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국제 조사단 구성 요구에 대해선 "진실을 희석하려는 시도이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부했다.
주요국 정상들은 9일 화상회의를 통해 베이루트 지원책을 모색한다. 이 화상회의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포함해 각국 정상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7일 전화통화에서 베이루트 참사에 대한 원조에 협력하기로 했다고 트위터를 통해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주요국 정상 중 처음으로 지난 6일 레바논을 찾아 베이루트 항구를 방문하고, 레바논 지도자들을 만났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