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여성으로 살다 보면 아직도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미투(#MeToo)'로 용기 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합니다. 세 번 헛기침합니다. 그리곤 말을 이어 갑니다.
[밀실]
'김지은입니다' 읽는 청년들
"박원순 전 시장 사건 피해자 기자회견을 봤는데 '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에 울컥했어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려는 피해자의 투쟁에 용기와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김지은씨가 자신의 피해를 고백한 건 2018년 3월, 책이 출판된 건 올해 3월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김지은입니다'를 꺼내 들었을까요. 이 책이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와 연대한다’는 메시지의 상징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박 전 시장 사건 이후 20·30대를 중심으로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요. '김지은입니다'를 읽은 청년들은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들과 우리 사회에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까요.
# 성폭력에 맞서 책을 꺼내 든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영상에서 확인하세요.
"책 읽어 연대합니다"…'독서 시위' 나선 사람들
30분간 책을 읽은 뒤 둥글게 모여 섰습니다. 각자 인상 깊은 구절을 소개합니다. 참석자들은 대학생부터 지역단체 활동가까지 다양했습니다. 참가한 동기는 똑같더군요. 한결같이 "박원순·오거돈·안희정 등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 답답하고 화가 나서 왔다"고 했습니다.
활동가 이선화(32)씨는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잘못을 하면 있는 그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스크 탓에 목소리가 잘 안 들릴까 걱정해서였을까요. '처벌받아야 한다'는 부분을 읽을 때 그의 목엔 핏줄이 섰습니다.
"가해자 대다수가 남성인 권력형 성범죄에 관해 (남성인) 제가 이야기해도 될까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박원순 사건과 안희정 사건이 겹쳐 보이면서 피해자들에게 지지를 표시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이런 독서회는 이날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은평구 응암역 4번 출구 앞에선 '은평 여성주의 책 모임'이 주관한 행사가 있었죠. 9명의 참가자는 '#피해자와_연대합니다'라고 적힌 스티커를 마스크에 붙였습니다. 벤치에 모여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침묵시위'를 벌였죠.
"피해자 증언 못 믿는다는 세력, 일본 정부 떠올라"
2차 가해 논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박 전 시장 부고가 전해진 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피해자의 신상 정보를 찾아내려는 글들이 올라왔죠. 아직도 관련 기사엔 "피해가 있었던 4년 동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한 것 아니냐"는 등의 댓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 전 시장을 감싸는 자들 역시 사회 권력층이기 때문에 자신의 발언이 피해자를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간다는 점을 알아야 해요. 사건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진 SNS 계정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어요."
대학생 참가자 송씨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피해자의 증언을 믿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보면 위안부 피해자를 의심하는 일본 정부가 떠오른다”며 “피해자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한다면 2차 가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책 구매 인증, 여성단체 후원…들끓는 SNS
지난달 5일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 전 지사의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가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인 6일에는 서울고등법원이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인 손정우(24)의 미국 송환을 불허했죠. 정관계·법조계 등 ‘높으신 분’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에 20·30대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취업준비생 구모(26)씨도 그중 한 명이죠. 구씨는 “대통령이 안 전 지사에게 조화를 보낸 걸 보고 너무 화가 났다”며 “성폭행 가해자 가족의 장례식에 공인들이 단체로 추모하는 모습을 보니 분통이 터졌다”는 겁니다.
소셜미디어도 들썩였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선 ‘김지은입니다’의 구매 인증이 이어졌죠. 박 전 시장의 영결식과 피해자의 첫 기자회견이 있었던 지난달 13일 트위터에선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란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피해자 측 기자회견을 주최한 여성단체들을 후원했다고 밝힌 글이 하루 200개 넘게 올라왔죠.
취재 도중 밀실팀이 만난 20·30대는 "박 전 시장 사건을 진보·보수 정치진영 간 싸움으로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권력형 성범죄 사건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약자가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 계기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직장인 정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원순·안희정 등 권력자에 의한 성폭력이 이제 막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소위 86세대가 뒷전으로 제쳐놓은 소수자의 인권 문제는 앞으로 계속 터져 나올 겁니다."
밀실은 '중앙일보 밀레니얼 실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밀도있는 밀착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영상=백경민·정유진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