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콜로라도 덴버에 사는 한 주부가 지역의 미술 애호가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 민화를 소개하는 에밀레박물관을 찾았던 그는 책거리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책거리 그림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며 덴버대 대학원 아시아학과에 등록했다. 나이 마흔다섯, 그때부터 그녀의 늦깎이 '책거리 공부' 인생이 시작됐다.
최근 영어로 쓰인 책거리 그림 연구서『Ch’aekkori Painting: A Korean Jigsaw Puzzle(책거리 그림: 한국의 퍼즐 맞추기)』(사회평론아카데미)가 출간됐다. 225x300㎝의 큰 판형, 330여 쪽이 넘는 학술서다. 저자는 케이 E 블랙(Kay E. Black), 바로 47년 전 한국을 찾았던 그녀였다. 지난달 말 한국에서 인쇄된 책을 국제특급배송으로 전달받은 블랙 여사는 책을 받은 지 열흘 만인 지난 5일 샌프란시스코 시니어타운에서 눈을 감았다.
케이 E 블랙, 영문 연구서 펴내
출간 열흘 만에 만 92세로 별세
70년대에 병풍 그림 보고 반해
45세부터 대학원 시작, 평생 공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부터 저자가 한국 책거리 공부에 헌신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면서 "이 책은 한국 회화사 연구에서 매우 의의가 큰 학문적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안 명예교수는 "책가도는 1980년대까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학자들로부터 진지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면서 "저자는 하버드대 에드워드 W 와그너(1924~2001) 교수와 함께 연구하며 '다수의 궁중 화가들이 책거리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들이 지배 엘리트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책거리에 대한 낡은 선입견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안 명예교수에 따르면 와그너 교수는 조선시대 족보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블랙 여사는 그와 협업하며 책거리 그림이 그려진 맥락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1990년대부터 '책거리 그림'(1993) '궁중 스타일 책거리'(1998) 등의 논문을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블랙 여사는 책의 서문에서 "책은 하버드대 한국학 창시자인 와그너 교수와 함께한 12년간의 공동작업의 성과"라고 밝히면서 "10년 전 집필을 마치고 출간하려 했다가 여러 문제로 좌절됐었으나 마침내 한국에서 책을 출간하게 됐다"고 썼다.
블랙 여사의 딸 케이트 블랙(미 피드몬트시 도시계획국장·64)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책은 진정으로 어머니 일생일대의 책(It was truly her life's work)"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책을 받은 뒤 어머니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감격스러워하셨다. 그토록 오랜 세월 책거리 그림을 연구하고 원고를 썼는데도 책 안에 담긴 그림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어머니는 평생 깊은 사랑으로 한국 미술과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했다. 어머니의 연구가 한국 미술 발전을 위해 책거리 그림의 남은 퍼즐을 푸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제게 훌륭한 롤모델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열성적이고, 총명하고, 기억력도 굉장히 좋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정말 사람들을 좋아하고 모험을 즐겼다는 것이었다"는 그는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경비행기 조종법도 배우고 1963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등반을 하셨다. 또 언니들과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엔 47년 동안 한국 문화 탐험을 하며 책거리 그림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용기와 집념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