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 정승되려면 '이곳'거쳐야

중앙일보

입력 2020.07.0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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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20)

궐내각사 안의 여유, 영의사

영의사(永依舍)는 선원전의 부속 건물로 선원전 행각 남쪽에 있다. 양지당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 오른 쪽에 있는데 편액이 없다. 선원전에 전배 시 왕비를 비롯한 여자가 머물던 공간이라고 전해지기도 하고 제례를 준비할 때 사용하던 부속 건물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건물의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영의사 공간이야 말로 궐내각사를 찾은 관람객들이 한번 쯤 그 마루에 앉아 소소한 궁궐 분위기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한적한 곳이다. 영의사 마당 서편에 아주 오랜 느티나무는 말없는 평온을 주기도 한다.
 
향실(香室)은 제사에 쓰이는 축문을 쓰고 향을 관리하던 곳이다. ‘전향축(傳香祝)’은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 왕이 서명한 축문과 향을 헌관에게 전달하는 의식이다. 교서관이 축문을 작성하고 향(香)을 제향별로 밀봉하여 올리면 왕이 직접 서압(署押:수결)을 한 후 헌관에게 전달한다. 왕은 축문에 서명한 후 헌관에게 직접 전달해 정성을 보이고 제사의 주관자임을 나타냈다. 종묘제례의 경우,제향 하루 전 새벽에 왕이 궁궐 편전에서 제향에 쓸 향(香)과 축(祝 :축문)을 제관에게 전달, 향축을 종묘의 향대청으로 옮겨 모시도록 했다.
 

창덕궁 인정전. 영의사에서 한 걸음을 쉰 후 동쪽으로 작은 문을 나서면 바로 인정전이 나온다. [사진 문화재청]

 
향실 옆의 예문관(藝文館)은 인정전 서쪽 행각과 향실이 맞닿아 있는 곳에 있다. 임금의 명령인 전교, 관직의 임명장인 사령서등을 작성하는 관청이다. 예문관원 중에 사관이 있어서 사초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도 보관했다.
 
영의사에서 한 걸음을 쉰 후 동쪽으로 작은 문을 나서면 바로 인정전이 나온다. 궐내각사에서 인정전으로 연결되는 관람 동선은 관리들이 일하는 궐내각사와 왕의 법전인 인정전이 소통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상당히 크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이 통로는 들여다보는 시각이나 내다보는 시각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다.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약방(藥房)

약방은 내의원(內醫院) 관청이 있던 건물로 왕과 왕실의 진료를 담당하는 곳이다. 내의원은 의료행정기관인 전의감, 서민의 치료를 담당했던 혜민서와 함께 삼의사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료기관이었다. 내의원의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와 제조가 5일 마다 의원을 인솔하고 임금께 문안하고 진찰하기를 청하였다. 내의원에서는 왕실의 진료와 의약을 담당하고, 차와 보양식을 올렸다. 약이나 차를 달일 물은 꼭 한강 한가운데서 길어다 은으로 만든 탕관에 달였다. 왕실 여성의 건강을 보살피던 의녀(醫女)의 공간이 약방에 딸려있다. 내의원에서는 왕명으로 의학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는데, 선조의 명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어의 허준이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귀한 인재가 모인 옥당

창덕궁 금천교. '옥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의 옥당은 금천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옥당은 금천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있다. 옥당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으로 옥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홍문관은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학문연구, 시강(侍講)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언론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홍문관은 궁궐에 보관하고 있는 서적을 관리하며 문한(文翰: 문장을 작성하는 것에 관한 일)을 다스리고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에 참여하였다. 왕의 경연에 참여하는 홍문관원은 왕 앞에서 경연을 이끌어 나가야 했으므로 뛰어난 학문과 문장력뿐만 아니라 언변에도 능통해야했기에 요즘 표현으로는 모범생다운 잣대로 불리는 ‘엄친아’라는 말로 통용될 듯 하다.


홍문관은 임금의 고문에 응하는 자문기구로 왕의 교지를 작성하고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언관의 기능도 수행해 삼사(三司)로 불렸다. 홍문관원은 늘 왕을 곁에 모시는 측근이었다. 따라서 옥당은 왕이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고 궐내각사 영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건물이다. 왕은 수시로 옥당에 드나들면서 정무(政務)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당 내부의 마당 남서쪽에는 조각 내담을 둘러 문간채의 문으로부터 차폐기능을 했다. 이곳이 왕이 수시로 드나드는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안쪽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안정감을 고려한 시각적인 공간 구획으로 볼 수 있다. 그 조각담장 안쪽에 매화나무 한그루가 있다. 봄이면 이 옥당 좁은 마당에 매화향이 가득하다.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도덕률, 청요직(請要職)

동궐도 좌하단부. 정중앙에 위치한 건물이 홍문관이다. [사진 나무위키]

 
홍문관 부제학 이하는 해당관아의 문한을 다스리고, 고문(顧問)을 대비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지제교(知製敎)와 사관(史官)을 겸대했다. 홍문관 관원은 대간원(사헌부·사간원의 벼슬의 총칭)처럼 그 업무와 관련해 능력이 있고 가문에 허물이 없는 인물을 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했고, 의정부와 육조 관원에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특히 홍문관 관원은 시종기능의 수행과 관련해 홍문록에 의해 제수되었고, 국왕의 총애와 신간서적의 사급, 사가독서(賜暇讀書), 음식물을 하사받는 등 대간보다 우월한 지위와 대우를 누렸다. 여기서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자를 홍문관·이조·정부(政府: 廟堂)의 투표(圈點)를 통해 다 득점자의 순으로 간선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 중에서 마땅히 낙점(落點)된 사람으로 충원하였으므로 홍문관원이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몇 겹의 검증 과정을 거쳐야만 다다를 수 있는 홍문관원이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스스로 느꼈을 자긍심 또한 매우 드높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 문치주의를 표방한 사회였으므로 이들에게 직책상의 업무에서 청빈함을 요구해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렀는데 또 다른 의미로 홍문관 관원이 된다는 것은 관리로서 요직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해서 모두에게 선망의 자리이기도 했다.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삼사의 언관(言官)은 벼슬의 품계는 높지 않았으나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에 진출한 문과 출신자만 배치 받았고 삼사의 수장이야말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자 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정승, 판서 등 고위관리는 거의 예외 없이 거쳐 간 진정한 엘리트 출세 코스였다.
 
삼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삼사의 기능 강화는 왕권견제와 권력독점,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탄핵을 해도 임금이 그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이 합세하여 간언하였고, 삼사가 함께 간언을 올릴 경우 임금은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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