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개봉하는 ‘나는보리’(감독 김진유)는 소리가 보이는 영화다. 전기밥솥 소음, 시계 알람, 바닷가 파도 소리가 돋보기 들이댄 듯 확대돼 다가온다.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한살 소녀 보리(김아송)의 눈과 귀로 세상을 감각하기 때문이다. 소리만큼이나 눈빛과 손짓도 크게 다가온다. 수어(手語, 농인들의 수화를 언어로 분류한 표기)로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부모와 남동생 틈에서 ‘나만 다르다’라며 외로워하는 보리의 고민이 눈높이로 전해진다.
들리지 않으면 나도 가까워질 수 있을까. “소리를 잃고 싶다”는 엉뚱하지만 간절한 소망을 이처럼 천진하게 빚어낼 수 있는 것은 김진유(32) 감독 본인이 ‘코다’ 출신이기 때문이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란 농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를 뜻한다. 주인공 보리처럼 강원도 주문진에서 자란 김 감독 역시 집에선 수어를, 학교에선 음성 언어를 쓰며 살았다. 부모님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게 별다르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서 학부모·친구들 앞에서 사회를 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농인인 김진유 감독 자전적 영화
소리를 잃고 싶은 11살 소녀 소망 담아
"청각장애 소비하는 기존 영화론 한계"
아역배우들 자연스러운 수어 연기 눈길
고향 강원도 주문진의 풍경에 담은 우화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똑같아지고 싶어서 소리를 잃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돼서 행복하다”는 현씨 말에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 떠올렸다. 강릉단오제에 놀러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부모님이 안내방송을 듣지 못하니 막막했던 경험, 옷가게 점원이 농인이라고 흉보며 어머니에게 바가지 씌운 기억 등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영화는 이런 실제 애환을 보리의 비밀작전에 맞물려 따뜻한 웃음기 속에 녹여냈다.
“어렸을 때부터 일반적인 영화들이 농인을 비롯한 장애인을 그리는 방식이 공평하지 않게 보였어요. 측은하게 몰아감으로써 그 자체로 소비해버리는 듯한? 실제론 똑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이웃에 살 지 모르는 농인 가족, 지체장애인 가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리를 잃고 싶다는 소망, 저도 가졌죠"
200여명의 오디션을 거쳐 주인공 보리로 발탁한 김아송을 비롯해 황유림‧이린하 등 아역배우들은 연기 뿐 아니라 처음 배운 수어도 생생하게 체화했다. 부모 역할 배우들과 처음 만난 날, 감독은 미리 아역배우 부모님들의 동의를 구해 마치 두 배우가 실제 농인인 양 소개했다고 한다. “1시간가량 손짓과 눈빛으로 대화하려 애쓰는 모습들에서 아이들이 영화 속 캐릭터와 하나가 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스턴트맨 출신으로 다큐영화 ‘우린 액션배우다’(2008) 등에서 주로 액션 연기를 선보여온 곽진석은 눈빛만으로 진한 부성애를 전하는 감성연기를 너끈히 소화했다. 실제 부부인 허지나와 집에서도 연기하듯 생활하듯 준비했다고 지난 12일 언론 시사 간담회에서 밝히기도 했다.
스턴트맨 출신 곽진석, 아내와 동반출연
‘나는보리’는 2013년 단편 ‘높이뛰기’로 주목받은 김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2016년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영화화까진 곡절을 겪었다. 이듬해 강원영상위원회와 한국영상위원회의 제작 지원을 각각 따낸 덕에 크랭크인이 가능해졌고 막판엔 사비 4000만원까지 들였단다. 차기작으론 20대 여성 농인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사랑 혹은 바다를 두고 서핑과 생계를 각각 영위하는 사람들 이야기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손에 끌려 영화를 나란히 본 아버지‧어머니는 “별 말씀 없이 쿨한 반응이었다”고. 농인 관객도 편히 볼 수 있도록 한국 영화임에도 한글 자막을 달고 상영된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